역사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68] 남미로 숨은 나치 고문기술자… 언론의 끈질긴 추적에 꼬리잡혔다

최만섭 2022. 6. 21. 05:16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68] 남미로 숨은 나치 고문기술자… 언론의 끈질긴 추적에 꼬리잡혔다

‘리옹의 도살자’ 클라우스 바르비

입력 2022.06.21 03:00
 
 
 
 
 
1987년 프랑스 법정서 종신형 선고받은 바르비 -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체포해 잔혹하게 고문한 클라우스 바르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 처벌을 피해 볼리비아에 알트만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볼리비아 군부 독재 체제를 도우며 반정부 인사들을 탄압한 그는 정체가 드러난 후에도 죄를 반성하지 않았다 . 1982년 볼리비아 군부 독재가 무너진 뒤에야 바르비는 프랑스로 압송됐고, 1987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사진은 바르비가 1987년 프랑스 법정에 들어서는 장면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972년 2월 3일, 프랑스의 유명한 TV 앵커 라디슬라 드 오요(Ladislas de Hoyos)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에서 클라우스 알트만(Klaus Altmann)이라는 사업가를 인터뷰했다. 알트만이 실제로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수천 명의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압송하고 많은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체포하여 잔혹하게 고문한 리옹의 게슈타포 수장 클라우스 바르비(Klaus Barbie)라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던 터였다.

자신들이 나치 전범을 보호하고 있다는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킨다며 볼리비아 정부는 프랑스 방송사가 문제의 인물 알트만을 직접 취재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다만 짧은 시간 안에 미리 약속한 질문만 스페인어로 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었다. 알트만은 자신이 베를린에서 태어난 독일계 인물이며 클라우스 바르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인터뷰 도중 드 오요는 불쑥 프랑스어로 ‘당신은 리옹에 간 적이 없습니까?’ 하고 물었고, 그는 즉각 독일어로 그런 적 없다고 답했다. 다시 말해 알트만이 프랑스어를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바르비의 사진들을 보여주며 이게 당신이 아니냐고 캐묻자 알트만은 사진 속 인물이 자신과 닮은 데가 없다며 부인했다. 마지막으로 2차 세계대전 중 고문 끝에 살해당한 레지스탕스 지도자 장 물랭의 사진을 던져주며 이 인물을 만난 적이 없느냐고 질문했다. 알트만은 사진을 손에 쥐고 무심히 들여다본 다음 만난 적 없다고 말하고는 사진을 돌려주었다. 드 오요는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거기에는 과연 알트만이 바르비와 동일인인지 아닌지 판가름해 줄 결정적 증거인 지문이 묻었기 때문이다.

바르비 정체 밝혀낸 프랑스 언론인 드 오요 - 프랑스 언론인 라디슬라 드 오요는 클라우스 바르비를 인터뷰해 그의 정체를 확인하는 물증을 확보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사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볼리비아 경찰이 방으로 들어와 필름 롤을 압수했다. 그렇지만 드 오요의 수완 좋은 동료는 이미 인터뷰 장면이 찍힌 필름 롤을 동석한 프랑스 대사관 직원에게 빼돌렸고, 태연하게 경찰에게는 공필름을 넘겨주었다. 인터뷰 필름과 사진에 묻은 지문을 통해 알트만이 20여 년 전 남아메리카로 도주해서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던 악랄한 게슈타포 수장 클라우스 바르비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30년 전인 1942년, 열렬한 나치 친위대 대원이었던 바르비는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다가 프랑스 리옹으로 전출된 후 이 지역 게슈타포를 지휘하는 수장이 되었다. 그는 ‘리옹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잔인한 짓들을 벌였다. 19세기 이래 감옥으로 사용하던 몽뤼크(Montluc) 요새에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수감한 후 정보를 캐내기 위해 장시간 악랄한 고문을 가하며 사디스트적인 희열을 느끼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한 증언에 따르면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남의 얼굴을 부수면서도 자기 옷소매에 희생자의 피가 묻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는 인물이었다.

1943년, 그의 앞에 레지스탕스 지도자 장 물랭이 끌려왔다. 드골 장군으로부터 전국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통합하라는 임무를 받고 활동하던 터라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므로 바르비는 장 물랭에게 엄청난 고문을 가했다. 그렇지만 그는 영웅적으로 고문을 이겨내며 끝내 발설하지 않다가 온몸이 거의 넝마가 된 상태로 사망했다. 1944년에는 이지외(Izieu)의 난민 수용소에서 유대인 아동 44명을 체포해서 아우슈비츠로 보냈다. 이해 8월 11일, 연합군이 리옹 가까이 진격한 최후의 순간, 그는 마지막으로 650명의 희생자들을 기차에 태워 아우슈비츠로 보내 죽게 만들고는 그 직후 혼란을 틈타 독일로 피신했다.

종전 73주년에 몽뤼크 감옥 찾은 레지스탕스 대원들 - 매년 프랑스 몽뤼크 교도소에선 나치에 희생당한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들을 잔인하게 고문했던 클라우스 바르비는 프랑스로 압송된 직후 몽뤼크 교도소에 투옥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뮌헨 남쪽 약 100㎞ 떨어진 멤밍엔으로 도주한 바르비는 이곳에서 수십 명의 인원을 규합하여 나치 전범들의 도주를 돕는 조직을 운영했다. 이들의 활동은 곧 미국의 방첩부대(Counterintelligence Corps·CIA의 전신)에 꼬리를 잡혔다. 그렇지만 미국 군 당국은 이 악당을 체포하는 대신 오히려 잘 활용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냉전 초기인 이 시기에 전직 게슈타포는 소련과의 정보전에서 실로 유용한 자원으로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감옥에서 썩히기에는 정보원으로서 너무나도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 받은 바르비는 미국 방첩대 정식 직원이 되어 활동했다. 독일 내 소련 비밀 조직에 침투하여 정보를 캐내고 프랑스 점령 당국 활동도 염탐했다.

악랄한 나치 전범이 버젓이 미국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프랑스 당국이 항의하며 바르비의 신원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미국은 그를 철저하게 보호했다. 급기야 미국 측은 비밀리에 그를 국외로 빼돌렸다. 1951년 바르비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를 거쳐 이탈리아의 제노바에 간 다음 적십자 임시 여권을 발부받아 남아메리카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바르비는 이제 알트만이라는 이름으로 볼리비아에 정착한 후 아마존 지역의 임산물 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사업 파트너로는 유대인들도 있었는데, 알트만은 자신이 판매하는 판자에 백묵으로 나치 십자가 표시를 하여 유대인 상인들의 분노를 사곤 했다. 바르비의 행방을 모르는 상태에서 프랑스 사법 당국은 궐석 재판으로 두 번 사형 선고를 내렸지만 정작 바르비는 1957년 볼리비아 국적을 얻었다. 그의 사악한 성향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그는 볼리비아 군부 독재 체제를 도와 반정부 인사들을 가차 없이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 알트만은 첩보와 조사 방법을 전수해 주었고,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고문을 가할 수 있는지도 가르쳐 주었다. 볼리비아의 고위층 인사들과 가까이 지낸 덕분에 사업상의 특권도 누릴 수 있었다. 그가 하는 사업은 역시나 사악한 종류의 일들뿐이었다. 예컨대 마약 밀수 카르텔에 무기 판매를 하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콜롬비아의 악명 높은 코카인 밀매업자로서 영화에도 자주 나오는 파블로 에스코바르(Pablo Escobar)와도 거래했다. 심지어 전직 나치 당원들을 모아 ‘죽음의 약혼자(los novios de la muerte)’라는 이름의 유사 군 조직을 만들어 오스트리아 무기 구매를 중개하기도 했다.

영원히 지속할 것 같던 그의 위세에 마침내 암운이 드리워졌다. 오랫동안 나치 잔당들을 추적해 오던 독일의 활동가 베아테 클라르스펠트(Beate Klarsfeld)가 여러 증거로 볼 때 볼리비아의 알트만이 다름 아닌 바르비라고 주장했고, 앞서 본 대로 프랑스 앵커 드 오요의 인터뷰로 인해 그것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프랑스의 퐁피두 대통령이 바르비를 송환하라는 친필 서한을 보내기도 했으나 볼리비아의 독재자 우고 반세르 수아레스(Hugo Banzer Suarez)는 거절했다. 바르비는 이제 자신의 신원을 숨기지도 않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과거에도 나치였고 지금도 나치요. 나는 독일에서 태어났고 독일을 위해 싸웠고, 독일인으로 죽을 거요.” 볼리비아 당국이 그를 철통같이 보호해 주는 한에서는 그가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2년에 가서 상황이 바뀌었다. 군부 독재가 무너진 후 권좌에 오른 새 대통령 에르난 실레스 수아소는 이 골칫덩이를 처치하고 싶어했고, 오랜 밀담 끝에 그를 프랑스로 인도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로 압송된 바르비는 상징적인 의미로 과거 자신이 게슈타포 수장으로 복무했던 몽뤼크 교도소에 투옥되었다. 이어진 재판에는 100명 이상의 나이 든 증인들이 출석하여 바르비의 잔악한 범죄 행위들에 대해 증언했다. 1987년 7월 4일, 클라우스 바르비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반인륜 범죄’ 관련 재판이었다. 재판 기간 내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표하지 않던 그는 1991년 77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악마 같은 한 인간의 삶이 마침내 종말을 맞았다.

[나치 전범들의 도주]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나치 전범들의 도주가 이어졌는데, 이때 파시스트 성향의 종교인들이 도움을 주곤 했다. 최초의 사례는 나치에 호의적인 오스트리아 주교 알로이스 후달(Alois Hudal)이었다. 1944년 그는 주교의 권위를 이용하여 이탈리아의 전범 수용소를 찾아가 위조 신분증을 만들어주며 독일인 나치 전범들의 도주를 도왔다. 종전 후에도 티롤 산지로부터 제노바까지 이어지는 도주로(Ratline·‘쥐 통로’)를 통해 전범들과 부역자들을 남아메리카로 빼돌렸다. 수도원들은 숙식을 제공하고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크루노슬라브 드라가노비치(Krunoslav Draganović) 사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크로아티아의 반(反)유고슬라비아 분리주의 운동 조직이자 파시스트 조직으로서 2차대전 중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 정교도와 유대인을 학살한 우스타샤(Ustaša)의 일원이었다. 학살 수용소의 사제였던 그는 종전 이후 탈주 동조자로 변신하여, 독일인 나치들과 이탈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파시스트들의 해외 도피를 적극 도왔다. 바르비 또한 이 신부의 도움으로 탈주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