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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글로브 ‘철옹성’ 깐부 할아버지가 깼다

최만섭 2022. 1. 11. 04:51

골든글로브 ‘철옹성’ 깐부 할아버지가 깼다

원로배우 오영수, 남우조연상 쾌거
한국 배우 최초로 연기 부문 수상
“생애 최초로 ‘난 괜찮은 놈’ 외쳐”

입력 2022.01.11 03:23
 
 
 
 
 
55년 연기 외길을 걸으며 숱한 상을 받았지만, 골든 글로브는 그에게도 특별했다. 오영수는 “처음으로 내가 나에게 ‘괜찮은 놈’이라고 말해줬다”고 했다. 노배우 개인뿐 아니라 한국 대중문화사에서도 이번 수상은 오래 기억될 기념비적 업적이다. /고운호 기자

골든 글로브도 오징어 게임 ‘깐부 할아버지’의 손을 들어줬다. 78세 배우 오영수는 미국 최고 영화·방송상으로 첫손에 꼽히는 골든 글로브의 TV 부문 남우조연상을 거머쥐며, 우리 대중문화의 역사를 새로 쓴 주인공이 됐다.

“수상 소식을 듣고 생애 처음으로 내가 나에게 ‘괜찮은 놈이야’라고 말했어요.” 9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수상자로 발표된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드라마에 출연한 한국 배우가 골든 글로브에서 수상한 것은 역사상 최초. 우리 영상 콘텐츠가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 시청자들을 만나면서, 남의 나라 잔치 같던 시상식들과 K콘텐츠의 거리도 더욱 가까워진 결과다. 55년 주로 무대 위 연기로 살아온 원로 배우 오영수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비밀에 싸인 노인 참가자 1번 오일남을 연기해 ‘월드 스타’가 됐다. 그는 “이제 ‘세계 속의 우리’가 아니고 ‘우리 속의 세계’”라며 “우리 문화의 향기를 안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슴 깊이 안고, 세계의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아름다운 삶을 사시길 바란다”고도 했다.

구슬치기로 생사가 갈리는 오징어 게임 6화 ‘깐부’의 한 장면. 포브스는 ‘깐부’ 편을 “올해 TV 드라마 에피소드 중 최고”라고 했다. /넷플릭스

오영수의 이번 수상은 비영어권 작품과 유색인종 배우에게 인색하기로 악명 높은 골든 글로브에서 거둔 성과라 더 의미가 크다. 뉴욕타임스도 오영수를 “가장 놀라운 수상자”로 꼽았다. 영화의 경우 ‘기생충’(2020)과 ‘미나리’(2021)가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받았지만, 작품상과 연기상 등 주요 부문에는 후보로도 올려주지 않았었다. 한편 배우 이정재가 후보였던 TV 드라마 남우주연상은 HBO맥스 드라마 ‘석세션(Succession)’에 출연한 배우 제러미 스트롱이 수상했다. ‘오징어 게임’이 후보였던 TV 드라마 작품상도 ‘석세션’이 가져갔다.

 

79년 역사의 골든 글로브지만, 올해는 사실상 할리우드 전체가 시상식을 보이콧하며 파행을 겪었다. 방송 파트너였던 NBC가 중계를 거절하면서, 영상 없이 홈페이지를 통해 문자로 수상자와 수상작을 발표해야 했다.

주최자인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는 잇따른 스캔들에도 자기 개혁이 더뎠다. 회원 명단도 공개하지 않는 폐쇄적 운영, 부족한 지역·국가 대표성, 소수 회원들이 누리는 특혜와 특권이 도마에 올랐다. 협회 가입을 거부당한 노르웨이와 스페인 기자가 미국 법원에 낸 소송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작년 2월부터 이어진 언론 폭로가 결정타였다. 회원 87명 중 흑인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밝혀지자 부랴부랴 신입 회원 21명을 받았는데, 그중 흑인은 6명뿐이었다. HFPA의 태도는 백인 위주 시상식을 비판한 ‘#OscarSoWhite’ 캠페인 뒤 심사위원을 대폭 늘리고 다양성을 보강하며 개혁에 나섰던 아카데미상과도 비교됐다. 2020년 한 해만 회원들이 각종 심사 등에 참여해 200만달러 이상을 챙겼고, 영화사가 일부 회원에게 호화 파리 여행을 제공했다는 등의 부패 스캔들도 폭로됐다. 시상식 파행은 개혁 의지가 없는 HFPA를 향해, 할리우드가 더 이상 특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며 ‘단체 무시’와 ‘합의된 침묵’으로 실력 행사를 한 결과였던 셈이다.

오영수는 이날 작품이 아닌 개인 골든 글로브 수상자 17명 중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다. 그의 수상이 인종 문제에 무감각했던 골든 글로브가 변화하는 시작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