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세계 지휘계는 지금 ‘한국 여성 돌풍’

최만섭 2021. 11. 30. 04:51

세계 지휘계는 지금 ‘한국 여성 돌풍’

샌프란시스코오페라 감독 김은선
뉴욕 메트서 ‘라 보엠’ 지휘 후 NYT서 리뷰·인터뷰로 연일 격찬
최근 암스테르담서 지휘한 성시연
내년 독일 뮌헨 명문악단서 데뷔, 진취적 레퍼토리에 유럽서 주목

입력 2021.11.30 03:00
 
 
 
 
 
샌프란시스코 오페라극장 첫 여성 감독인 김은선(왼쪽)과 성시연 전 경기필하모닉 음악감독은 현재 세계 음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한국 여성 지휘자들이다. /프랑스 릴 국립 오케스트라·스트라스부르 필하모닉

“오페라의 정서적 핵심인 3막에서 보여준 지휘자의 해석은 비할 바 없이 탁월했다.”

평소 깐깐하기로 소문난 미국 뉴욕타임스의 수석 음악 평론가 앤서니 토마시니(73)가 이런 격찬을 쏟아냈다. 최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메트)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을 관람한 직후였다. 상찬(賞讚)의 주인공이 된 지휘자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극장의 첫 여성 음악감독인 김은선(41)이었다. 토마시니는 김은선이 지휘한 ‘라 보엠’에 대해 “지휘자가 보여준 성취는 디테일에 있었다” “좋은 소식은 김은선이 올 시즌 메트의 ‘라 보엠’을 대부분 지휘한다는 점”이라고 연이어 극찬을 보냈다. 이 신문은 공연 리뷰뿐 아니라 별도의 장문 인터뷰를 통해서도 그의 음악 세계와 삶을 조명했다.

김은선은 현재 미국 오페라계에서 가장 눈부시게 비상하고 있는 한국 여성 지휘자다. 연세대에서 작곡을 전공하다가 대학 4학년 때 학내 오페라 공연에 참여하면서 지휘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공연작도 ‘라 보엠’이었다. 현재 뉴욕에 체류 중인 그는 영상 인터뷰에서 “그때부터 지금 뉴욕까지 데뷔작은 ‘라 보엠’이었다. 푸치니의 이 오페라는 내 곁에 머물러 있는 삶의 동반자”라며 웃었다.

김은선은 2018년 휴스턴 오페라극장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임명되면서 미 오페라에 연착륙했다. 2019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극장의 첫 여성 감독으로 지명됐다. 샌프란시스코 극장은 영화 ‘귀여운 여인’에서 사업가 에드워드(리처드 기어)가 여주인공 비비언(줄리아 로버츠)을 전용기에 태우고 날아가 오페라를 관람하는 장면의 무대로 친숙하다. 올해는 미 최고의 오페라극장인 뉴욕 메트 데뷔 무대까지 고공 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내년 3월에는 시카고 리릭 극장에서 푸치니의 ‘토스카’를 지휘한다. 흔히 뉴욕 메트와 시카고, 워싱턴, 샌프란시스코 등이 ‘미국 최정상 오페라 극장’으로 꼽힌다.

그는 영어·독일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 등을 구사하는 ‘외국어 악바리’다. 2019년 드보르자크의 오페라 ‘루살카’를 지휘할 때는 틈틈이 체코어도 공부했다. 당시 그가 지휘하면서 입으로는 체코어 아리아를 따라 부르는 모습은 미국 음악계에서도 화제가 됐다. 그는 “지금도 라디오 방송이나 인터넷, 현지인과의 대화 등을 통해서 외국어 공부를 하루도 거르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지난 1월 서울시향을 지휘한 성시연의 모습. 지난달 한국 여성 지휘자로는 처음으로 보스턴 심포니의 지휘봉을 잡았다.

김은선이 미국 오페라에서 화려하게 부상하고 있다면, 유럽 정상급 악단들이 주목하는 한국 여성 지휘자는 성시연(45) 전 경기필하모닉 음악감독이다. 지난 5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RCO)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내년 7월에도 독일 뮌헨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데뷔를 앞두고 있다. 이들 악단은 베를린 필, 빈 필과 더불어 유럽 최고 오케스트라를 꼽을 적마다 빠지지 않는 명문이다.

콘세르트허바우는 지휘자와 협연자가 흡사 의식을 치르듯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서 무대에 서는 공연장 풍경으로 유명하다.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는 성시연은 인터뷰에서 “당시 문이 열리자 마치 콜로세움에 선 것처럼 압도적인 비주얼이 펼쳐졌고, 수많은 시선이 오로지 저를 향하는 것을 정면으로 보는 순간 짜릿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성시연이 주목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레퍼토리 선정 때문이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중국 작곡가 탄둔의 신작 트롬본 협주곡과 윤이상의 현대음악을 선보였고, 내년 뮌헨에서도 진은숙의 생황 협주곡과 윤이상의 ‘예악’ 등을 지휘한다. 그는 현대음악에 대한 도전을 “아무도 밟지 않았지만 뽀얗게 쌓여 있는 눈에 첫발을 내딛는 듯한 희열”에 비유했다.

현재 미국에서도 상위 20여 개 교향악단 가운데 여성 지휘자가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경우는 마린 앨솝(볼티모어 심포니 명예감독), 나탈리 스튀츠망(애틀랜타 심포니 차기 감독)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한국에서는 첼리스트 겸 지휘자 장한나(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 여자경(강남 심포니)씨 등이 활동하고 있다. 성시연씨는 “아직 여성 지휘자가 적지만 선배 여성 지휘자들의 피와 땀 덕분에 최근 많은 기회의 문이 열리고 있다”면서 “저희들이 가는 길도 후배들에게 열린 기회를 주기 위한 과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