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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제도

[박해현의 문학산책] ‘트럼피즘’의 분신들이 이 땅에 뿌려놓은 비극

by 최만섭 2020.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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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현의 문학산책] ‘트럼피즘’의 분신들이 이 땅에 뿌려놓은 비극

책보다 골프채 가까이했던 트럼프의 역설… 그와 관련 책만 150여종
‘독선적 애국주의’ 정치인들 득세 비결은 ‘과거 역사의 신화적 재현’
우리 사회의 거짓말과 궤변, 음모론… 트럼프 얼굴과 겹쳐 떠올라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입력 2020.11.12 03:00

 

 

미국 대통령을 지낸 버락 오바마는 독서광으로 이름이 높았다. ‘독서계의 통수권자’로 불릴 정도였다. 그는 해마다 좋은 책을 골라 공개적으로 추천했다. 지난 2015년 그는 한 권의 소설을 ‘올해 최고의 책’으로 꼽았다. 소설가 로런 그로프(42)의 장편 소설 ‘운명과 분노’였다. 그로프는 젊은 나이에 벌써 ‘산문의 거장’으로 불리면서 주목받는 작가였지만, 오바마의 추천 덕분에 그 위상이 더 높아졌다. 작가는 오바마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을 적폐로 몰아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는 발언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곤 했다.

'트럼피즘'의 분신들이 이 땅에 뿌려놓은 비극 / 일러스트=김하경

‘운명과 분노’는 3년 전 우리말로 번역됐다. 작가에게 이메일을 보내 문답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그 소설이 그리스 비극에 바탕을 두었고, 작가가 평소 트럼프에 대해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통치하는 미국의 현실은 비극인가, 희극인가’라고 짓궂은 질문을 던져봤다. 그녀는 '아, 선거 기간에는 우리 모두 희극이라고 생각했다. 끔찍하고 믿을 수 없게도 그가 집권한 현재는 당연히 비극이다"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최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트럼프를 꺾었기에, 그 작가의 반응이 궁금해 트위터를 열어봤다. 그녀는 “잘 가, 얼간이(loon)”라면서 간결하게 트럼프의 패배를 반겼다. 평소 예측 불허였던 트럼프가 이번엔 예측한 대로 선거 결과를 승복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아무리 뭉개고 있어도 백악관의 시계는 돌아가고, 주인은 바뀌기 마련이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트럼프가 물러난다고 해서 ‘공포와 분노를 조장해 수천만 명의 지지를 얻은 트럼피즘(trumpism)이 마치 마술을 부린 듯 사라지지는 않는다’라고 내다봤다. 트럼프의 통치술은 미국 우선주의와 백인 우월주의에 바탕을 두면서, ‘독선적 애국주의’로 불렸다. 통합보다는 분열을 조장해 지지층을 확보하고, 비판 언론을 ‘가짜 뉴스’라고 몰아세우면서 정치적 양극화를 초래했다. 그러한 트럼피즘은 민주주의의 약점을 노출시켰고, 이번에 접전을 벌인 선거에서 드러났듯이, 만만치 않은 지지층을 두고 있기에, 언제라도 다시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 있다.

 

트럼프는 책 읽기를 자랑한 오바마와는 달리 책보다는 골프채 휘두르는 모습을 자주 공개했고, 떳떳하게 막말을 일삼으면서 ‘반(反)지성주의’를 내세웠다. 그런데 책을 멀리한 트럼프는 역설적으로 미국 출판계에 호재를 안겨줬다. 트럼프의 인생과 통치술, 정책을 둘러싼 뒷이야기를 다룬 책만 150여 종이 나왔다고 한다. 트럼프 시대를 계기로 ‘탈(脫)진실’ 시대의 진리 찾기라든지, 민주주의의 본질적 위기를 심각하게 고민한 책도 눈길을 끌었다. 그중 몇 권이 우리말로 번역됐는데, 티머시 스나이더(예일대 역사학과 교수)가 쓴 ‘폭정-20세기의 스무 가지 교훈’(조행복 옮김)이 많이 읽혔다고 한다. 이 책은 국가주의와 대중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같은 정치가들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늘 득세하기 마련이고, 그 비결은 ‘과거 역사의 신화적 재현’에 있다고 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은 1930년대 나치 독일에 저항하던 구호의 재현이었고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를 선동한 정치인들은 어설픈 애국심을 부풀려 대중을 최면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인터넷을 이용해 대중을 선동하는 것과 관련해 이 책은 ‘권력은 우리의 몸이 의자에 파묻혀 나약해지기를, 우리의 감정이 스크린 속에서 허비되기를 원한다’라고 했다.

 

 

그 책을 읽다가 종종 문재인 정권의 ‘트럼프 시늉’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넷 댓글을 조작해 집권에 유리한 기반을 조성하거나, ‘심리적 내전’ 상태를 이용해 분열로 지지층을 결집하거나, 일본을 향해 ‘죽창가’를 부르자며 ‘관제 민족주의’를 내세우거나, 국제사회가 고민하는 북한 비핵화를 ‘우리 민족끼리’의 감성으로 접근하는 게 결국 우리 사회에 드리운 '폭정’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트럼피즘은 여러 인물을 통해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는 듯하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소설 쓰고 있네’라며 타인을 거짓말쟁이로 만들면서 거짓말을 생산한다든지,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이 궤변론자를 혼냈던 소크라테스를 언급하면서 거꾸로 궤변을 늘어놓는다든지, 김어준 교통방송 뉴스 진행자가 얼토당토않은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을 트럼프의 얼굴과 겹쳐서 떠올리게 된다. ‘선거 부정’을 주장하던 트럼프의 우스꽝스러운 목놀림이 도리깨질을 통해 수많은 분신을 퍼트리는 게 우리 시대의 희극이자 비극인 듯이.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편집국 문화부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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