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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판 줄서기를 보며 풍수 라이벌 목효지와 문맹검을 떠올리다

최만섭 2016. 5. 7. 10:56

정치판 줄서기를 보며 풍수 라이벌 목효지와 문맹검을 떠올리다

  •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입력 : 2016.03.26 03:00 | 수정 : 2016.03.27 11:17

[김두규의 國運風水]

[김두규의 國運風水]
'배신은 낙천, 줄서기는 공천.' 최근 국회의원 공천 심사를 보면서 떠오르는 단상이다. 배신의 의미는 잘 알려져 있으나 줄서기의 한자어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줄서기는 아부(阿附)의 다른 말이다. 언덕[阿]에 기댄다[附]는 뜻이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말과 통한다(이한우 '아부의 즐거움'). 정치판을 보면 무엇이 배신이고 무엇이 아부(줄서기)인지 혼란스럽다. 조선 풍수사(風水史)를 통해 이를 분간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목효지와 문맹검이란 인물에게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둘은 라이벌로 세종과 세조 사이에 활동한 풍수들이다. 둘의 운명은 세조의 즉위와 더불어 극과 극으로 달라진다. 목효지는 교수형을 당하였고 문맹검은 원종공신이 된다. 표면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목효지는 단종 편에 줄을 섰고, 문맹검은 수양대군(세조)에게 줄을 섰다. 아부, 즉 줄서기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목효지는 300여년 후인 1791년 정조 임금에 의해 신원된다. 문맹검이 현실에서 승리한 반면, 목효지가 역사의 승자처럼 보인다. 목효지는 진정 충신이었고 문맹검은 배신자였을까? 풍수사적 관점에서 보면, 목효지가 옳았고 문맹검이 틀렸다고만 말할 수 없다.

목효지는 본디 노비였다. 세종 23년(1441년) 세종의 며느리 권씨가 왕자(훗날 단종)를 낳고 산후 후유증으로 죽는다. 장지가 안산(현재 안산시 목내동)으로 정해졌다. 이때 목효지가 '그 땅은 장차 후손이 끊길 땅'이라는 상소를 올려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는다(훗날 그 예언은 적중한다). 또 문종이 죽자 장지를 태종과 세종의 무덤(현재 서울 서초구 헌인릉) 부근으로 정한다. 이때 목효지는 그 땅이 주인(임금인 단종)은 약하고 손님(당시 실세인 수양대군)이 강하게 될 이른바 "주약객강(主弱客强)의 흉지"라고 주장한다(그의 예언은 곧바로 사실로 증명되는데 광중에서 물이 솟았기 때문이다). 목효지는 실로 풍수 고수였다. 그런 그가 왜 죽임을 당했을까? 그는 '풍수 확신범'이 되어 임금의 통치행위를 무시하려 들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불당(佛堂) 설치 불가론이었다. 세종이 경복궁 뒤에 불당을 설치하려 하자 목효지는 격렬하게 반대한다. 풍수적 관점에서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세종의 역린을 건드릴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세종은 그를 다시 노비로 환속시켜 버린다.

그의 라이벌 문맹검은 어떠했을까? 두 가지가 그를 원종공신이 되게 한 배경이다. 첫째, 그는 임금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불당 설치를 찬성하였고 터잡기에 직접 참여한다. 왜냐하면 임금의 통치행위에 풍수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국토 및 도시 관리 차원에서 풍수를 논한다. 당시 한양 도성의 풍수 취약점이 있지만 그것은 비보풍수로 해결할 수 있는 자잘한 문제로 보았다. 대신 그는 한양은 중국의 도읍지에 버금할 수 있는 삼원(三垣·자미원 태미원 천시원의 천문이 반영된 최고 길지)의 땅이라고 하여 왕실과 백성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주고자 하였다.

이처럼 목효지와 문맹검의 풍수는 지향하는 바가 달랐다. 목효지가 묘지풍수만을 전부로 알고 자신만이 최고의 술사라고 고집을 부렸다면, 문맹검은 임금의 통치행위와 국역 관점에서 풍수를 활용하고자 하였다.

아부는 좋은 것이며 배신은 나쁜 것인가? 목효지의 아부는 단견이었고, 문맹검의 배신은 왕실과 국가를 염두에 둔 풍수적 배신이었다. 분명한 것은 확연대공(廓然大公·마음을 넓게 하여 크게 공평무사함)을 전제하는 배신은 배신이 아니며, 소아(小我·사적 욕망에 사로잡힌 자아)에 집착한 아부는 진정한 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