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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72] 軍國의 추억… 日, 29년간 밀림서 게릴라전 벌인 전범을 영웅대접

최만섭 2022. 8. 16. 05:08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72] 軍國의 추억… 日, 29년간 밀림서 게릴라전 벌인 전범을 영웅대접

최후의 日제국군 오노다, 왜 1974년에 항복했나

입력 2022.08.16 03:00
 
 
 
 
 
민간인 30명 학살한 패잔병에 환호하는 일본 - 1944년에 일본 정보 장교로 필리핀 루방섬에 주둔한 오노다 히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사실을 모른 채 숨어 지내다 1974년에 투항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오노다는 극우파 사이에선 진정한 사무라이로 불렸지만, 필리핀 주민을 살해한 옛 제국주의 군대의 패잔병이라는 평가도 뒤따른다. 사진은 오노다(가운데 탑승 계단 맨 앞 인물)가 1974년 3월 12일 도쿄 공항에 도착해 지면에 첫발을 내딛는 장면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945년 8월 15일, 일왕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면 일본 국민이 전멸하고 인류 문명 전체가 붕괴할 위험이 있다며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9월 2일, 미국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었다. 그렇지만 태평양에 산재한 여러 섬 밀림에는 일본군 패잔병 상당수가 종전 소식을 모르거나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숨어서 저항을 계속했다. 그중 대다수는 결국 투항하거나 현지 군과 교전 중 사살되었으나, 끝까지 버티며 저항한 사람이 없지 않다. 필리핀 북부 루방섬에 숨어 있던 오노다 히로오(小野田寛郎·1922~2014)가 대표적이다.

오노다 소위는 1944년에 정보 장교로 루방섬에 주둔하게 되었다. 1945년 2월 연합군이 이 섬을 점령하면서 일본군 대부분은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하였지만, 오노다 소위와 세 병사는 정글 깊숙이 숨어 들어갔다. 수년 동안 이들은 게릴라전을 벌이며 버텼다. 그러던 중 1949년에 병사 한 명이 숲에서 나가 필리핀군에 투항했다. 남은 사람들은 이 ‘배신 행위’에 분개하며 더욱 저항 의지를 굳혔다. 오노다 소위가 생존해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정부는 5차에 걸쳐 현지에 수색대를 파견했다. 먼저 투항한 동료가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밀림에서 나오라는 편지를 써서 뿌렸지만, 이들은 적군의 계략이라며 믿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오노다와 그의 동료들은 주변 농촌을 습격하여 주민 30명을 살해하고 1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식량과 물자를 약탈하면서 연명했다. 1954년 필리핀 수색대와 교전이 벌어져 한 명이 사살되었고, 1972년 경찰의 총격으로 또 한 명이 사망했다. 이제 오노다 홀로 남았다. 그는 직속상관이었던 다니구치 요시미 소좌가 내린, 부대가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투항하지 말라는 명령만 기억하고 있었다. 정작 다니구치씨는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을 후회하여 루방섬 27곳에 일왕의 항복 명령문을 게시하고 부하들의 투항을 권고했지만, 깊은 숲속에 숨은 오노다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지나친 자기 확신에 갇히면 헤어날 수 없는 모양이다. 오노다는 주민에게서 훔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통해 도쿄올림픽이 개최되어 미국 선수들과 일본 선수들이 함께 스포츠 경기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전쟁 중에도 스포츠 경기만은 평화롭게 이루어지는 모양이로군’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오노다를 찾아낸 사람은 노리오 스즈키라는 젊은 일본인 모험가였다. 그가 세운 버킷리스트는 ‘오노다 소위, 판다곰, 히말라야의 설인(雪人)’을 만나는 것이었다. 운 좋게 첫 번째 미션에 바로 성공했다. 1974년 스즈키는 루방섬을 찾아가 산속 깊이 들어갔다. 이상한 기척을 느낀 오노다가 총을 들고 다가왔다. 스즈키는 자신을 일본인 여행자라고 소개하며 안심시킨 후 ‘혹시 오노나 소위 아닙니까?’ 하고 물었다. 오노다는 실로 오랜만에 다시 모국어를 들었다. 함께 담배도 피우고 식사도 한 다음 스즈키는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자기와 함께 일본으로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이번에도 오노다는 직속상관 다니구치의 명령이 있어야만 떠날 수 있다고 답했다. 스즈키는 일본에 가서 상관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일본에 돌아가면 자칫 아무도 자기 말을 믿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스즈키는 오노다에게 함께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고, 두 사람은 사진 30여 장을 찍었다.

스즈키의 증언에 따라 일본 당국은 현지에 구출반을 보내 수색 작업을 벌인 끝에 드디어 오노다를 만났다. 당시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하던 99식(九九式) 소총 한 자루와 총탄 500발, 일본도, 수류탄, 군복과 옷 몇 점, 취사도구, 전등 같은 물품을 지니고 있었다. 또 만일 포로로 잡히면 자결하라고 어머니가 준 단도까지 잘 보관하고 있었다. 오노다는 친형 도시오를 보고 뜨겁게 포옹했다. 그동안 규슈에서 서적상(書籍商)을 하고 있던 그의 상관 다니구치가 ‘전투 행위와 작전을 즉각 중지하고 가까운 곳의 상관 명령을 받을 것이며, 그러지 못할 경우 미군이나 필리핀군의 지시를 받으라’는 투항 명령서를 낭독했다. 이 명령에 따라 오노다는 일본 대사의 입회 아래 필리핀 공군 사령관 호세 랑쿠도 소장에게 정식으로 투항했다. 88세인 그의 어머니도 아들의 생존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오노다 소위가 구출된 이날은 마침 그의 52세 생일이었다.

오노다가 숨어 살던 지역 인근의 농민들과 어민들은 이 ‘패잔병 놈’이 그동안 수십 명을 살해하고 곡식을 불사르거나 약탈해 간 악마 같은 놈이라며 처벌을 요구했지만 일은 다르게 진행되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오노다의 범죄를 사면해줬다. 22세에 조국을 떠났던 청년은 50세가 넘어 일본에 돌아왔고, 일본 국민에게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패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일본 국민들은 오노다에게서 ‘살아있는 일본 정신을 보았다’고 열광했고, 극우파는 오노다야말로 일본의 전통 가치를 그대로 간직한 진정한 사무라이라고 칭찬했다. 실제로 오노다는 일본 제국 군인의 가치관을 버리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준 보상금, 심지어 30년 군무의 대가를 계산하여 준 월급도 수령하기를 거부하고 전액을 야스쿠니 신사에 기부했다. 1974년 오노다는 자기의 삶을 소개하는 책을 써서 출판했다. 정글 한가운데에서 수행했던 명령, 생존, 숲에서 보낸 삶 등을 소상히 소개했지만, 그가 저지른 민간인 살상 행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미주리호서 연합군에 항복하는 日 육군대장 - 1945년 9월 2일 미국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 육군을 대표해 우메즈 요시지로 대장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30년 만에 돌아온 일본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근대화된 일본 사회는 옛 제국 군대 소위의 가치관을 지닌 사람에게는 살아가기 벅찬 곳이었다. 게다가 연일 그에게 향하는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도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브라질로 이민 가서 목장을 경영하였다. 이곳에서 그의 친척들을 만났고, 또 후일 아내가 될 사람도 만났다.

그러던 중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질겁했다. 어떤 젊은이가 부모를 칼로 찔러 죽였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타락한 일본 사회를 구제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84년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서 일종의 서바이벌 캠프인 오노다 자연학교(小野田自然塾)를 만들었다. 일본 젊은이들이 자연 속에서 살며 인내, 용기, 명예 같은 가치를 회복하도록 돕는다는 취지다. 그렇지만 그가 견지하는 옛날식 가치관이 과연 현대 일본 젊은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후 오노다의 행적을 보면 그의 사고는 암만해도 제국주의의 잔재(殘滓)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노다는 결혼 후 아내와 함께 우익 활동가의 삶을 살았다. 그는 일본 군부의 위안부 운영 책임을 부인하고, 일본군이 저지른 남경대학살이 중국 측의 조작이라는 주장을 펴곤 했다. 그는 2014년 1월 16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한편 루방섬에서 오노다를 찾아낸 노리오 스즈키는 판다곰을 직접 보겠다는 두 번째 미션까지는 성공했지만 마지막으로 설인을 만나고자 히말라야에 갔다가 산사태를 만나 사망했다.

오노다는 어떤 존재인가? 일본 우파 인사들에게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도를 간직하고 상관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며 적에게 저항한 ‘마지막 사무라이’나 ‘참군인’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물론 필리핀 현지 주민들로서는 잔혹한 산적으로 변신한 옛 제국주의 군대의 패잔병이며 반드시 처벌해야 마땅한 전범에 불과했을 터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현재, 그는 역사의 흐름에 떠밀려 열대 밀림으로 추방된 후 그곳에서 헛된 이데올로기를 부여안고 젊은 시절을 탕진한 가련한 운명의 희생자로 보일 뿐이다.

[태평양섬 곳곳에 日패잔병]

정글서 끝까지 저항하다 기미가요 부르는 소리에 나타나 항복하기도

일본 제국군의 잔존 군인이 또 한 명 있다. 일본군 이름은 나카무라 데루오지만 원래 타이완 동부 산악 지역 아미스족(河美族) 원주민으로서 본명은 스니오였다.

일제는 동남아시아 열대우림의 전선에서 잘 싸우리라 여겨지는 대만 산악 부족 사람들로 고사의용대(高砂義勇隊)를 만들었는데, 그는 이 부대의 병사로 동원되어 인도네시아 모로타이섬에 배치되었다. 연합군이 이 섬을 점령한 후 그는 섬 깊숙이 숨어 들어가 작은 오두막 캠프를 짓고 홀로 버텼다. 행방을 알지 못한 일본군은 그를 사망 처리했다.

오노다 소위가 생환한 해인 1974년, 우연히 그의 생존 사실이 알려져 수색대가 파견되었으나 그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여러 사람이 기미가요(일본 국가)를 합창하자 그가 나타났다. 일본이 패망하고 이미 전쟁이 끝났다고 말하자 그는 ‘일본이 질 리가 없다’고 화를 냈다.

대만 정부는 그에게 리광후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대만 내 소수민족 출신의 일본 제국군이었던 그는 어느 나라에서도 진심 어린 환영을 받지 못한 듯하다.

31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 보니 아내는 이미 재혼했고, 헤어질 때 한 살이었던 아들은 청년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선 현대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던 그는 몇 년 후 60세에 폐암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