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진홍의 컬처 엔지니어링] ‘겸손의 결핍’이 유리권력을 만든다

최만섭 2022. 7. 27. 05:25

[정진홍의 컬처 엔지니어링] ‘겸손의 결핍’이 유리권력을 만든다

입력 2022.07.27 03:00
 
 
 
 
 

# 미국 공화당의 정치 지도자였던 존 매케인은 3대에 걸쳐 해군에 투신한 병역 명문가 출신이었고, 베트남 전쟁 당시 무려 5년 6개월간의 포로 생활을 끝까지 견뎌낸 오뚜기 같은 철인이었다. 그가 포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사실상 베트남 전쟁을 지휘하는 미 태평양사령관이었다. 월맹 측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갖기 위해 존 매케인을 포로에서 우선적으로 풀어줄 의향을 내비쳤지만, 매케인 자신과 그의 아버지는 약속이나 한 듯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결국 매케인은 포로 생활의 후유증으로 평생 장애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지만 결코 이를 후회하지 않았다. 포로에서 풀려난 후에도 군 복무를 지속하다 1981년 대령으로 예편한 매케인은 정치인이 되었고, 하원을 거쳐 상원의원이 된 후 미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8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인격이 곧 운명”이라고 말하곤 했던 그는 정치의 문제는 ‘겸손의 결핍’에서 기인한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

# 작금의 윤석열 정부가 당면하고 있는 제반의 문제들도 그 뿌리를 살짝이라도 들춰보면 한결같이 ‘겸손의 결핍’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사안 그 자체보다도 그 사안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가 크다는 것이다. 당장의 현안으로 등장한 경찰국 신설을 둘러싼 소동도 마찬가지다. 날은 무덥고 우리네 삶은 장마통에 축축해진 이불 털 듯 퍽퍽한데, 난데없이 ‘쿠데타’ 운운하는 소리와 함께 한바탕 소란이 일고 있지 않은가. 행정안전부 내에 경찰국 신설 문제를 둘러싸고 총경급 경찰간부들이 모인 것을 아무리 비판하고 견제한다 해도 졸지에 ‘쿠데타’ 음모로 몰아붙이는 것은 나가도 너무 나간 것이다.

설사 일을 벌린 것은 경찰이었다 해도 그 일을 걷잡을 수 없이 키운 것은 행안부 장관 본인의 입이었다. ‘하나회’, ‘12·12′ 까지 소환하며 들먹거린 ‘쿠데타’ 운운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경찰국 신설에 관심 없던 경찰마저도 행안부 장관의 발언이 경찰에 대한 하대와 무시라고 느끼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감정선을 제대로 건드린 셈이다. 그 바람에 어제 국무회의에서 행안부 내 경찰국 신설을 위한 ‘행정안전부와 그 소속 기관 직제 일부 개정령안’이 통과돼 다음 달 2일 공포·시행되기에 이르렀지만, 사태는 진정되긴커녕 마른 날 바람 부는 산불처럼 번지고 있다.

급기야 오는 30일 ‘14만 전체 경찰회의’까지 강행하겠다고 예고되지 않았는가! 장관이 입으로 ‘쿠데타, 쿠데타’ 하더니 정말이지 말이 씨가 되어버릴 지경에 이르러 버린 게 아닌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우려한 대로 경찰이 시위하면 도대체 누가 그 시위를 막나? 정부가? 군대가? 아니다. 그것을 막는 사람은 국민뿐이다. 국민의 마음을 못 얻으면 다 소용없고 부질없는 일들이다. 그런데 대다수 국민이 이상민 행안부 장관의 쿠데타 발언에 대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면 일을 어찌 수습해야 하는가? 이 장관은 애초에 경찰국 신설과 관련해 좀 더 겸손하게 접근했어야 했다. 그런다고 일이 안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되레 지금처럼 으름장 놓고 압박하는 바람에 일이 덧나다 못해 수습 불가의 지경이 되고 만 것 아닌가. 한마디로 겸손의 결핍이 문제를 키운 것이다.

 
 

#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 추락 역시 나는 겸손의 결핍에서 왔다고 본다. 윤 대통령을 두고 시중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에 ‘건들건들’이란 의태어가 있다. 한때는 ‘도리도리’였는데 이젠 ‘건들건들’이다. 걷는 자세와 서 있는 품새를 보고 세간의 민초들이 본대로, 느낀 대로 툭툭 던진 얘기다. 흠집 내고 트집 잡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매일 출근하며 등청할 때 걷는 모습에서 또 도어스테핑에 임하는 자세에서 사람들은 그 ‘건들건들’이라는 의태어를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건들건들이란 의태어 안에는 대통령답지 못하다, 반듯하지 못하다, 진중하지 못하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지만, 무엇보다도 겸손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자세로 던지는 말마다 지지율을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 해보는 건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시죠?” “지난 정부에서 이렇게 훌륭한 장관 보셨습니까?” 겸손과는 거리가 먼 그 독선과 아집이 물씬 풍기는 이런 말들에 국민들은 고개를 젓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대통령 본인만이 아니다. 부인 김건희 여사, 최측근 윤핵관으로 불리는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직무대행, 그리고 앞서 언급한 이상민 실세 장관 등도 마찬가지다.

# 생전에 존 매케인이 ‘인격이 운명이다!’라고 말했다면 나는 ‘태도가 운명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 하락과 윤 정권의 위기는 정책이나 이념 때문이 아니라 태도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거듭 지적하고 싶다. 그 태도란 국민을 대하는 태도, 여론을 대하는 태도, 언론을 대하는 태도, 야당을 대하는 태도, 수하를 대하는 태도, 무엇보다도 역사를 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리고 그 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에 대한 겸손, 여론에 대한 겸손, 언론과 야당 그리고 아랫사람이라 여겨지는 이들에 대한 겸손, 무엇보다도 역사에 대한 겸손이 몸에 배어야 한다. 그래야 잡은 권력을 유지하고 제대로 쓸 수 있다.

# 화려해 보이지만 부서지기 쉬운 권력을 ‘유리 권력’이라 한다. 겸손이 결핍된 권력은 대개 유리 권력화한다. 그만큼 쉽게 부서진다. 작금의 윤석열 정권이 갖고 있는 권력도 그럴 소지가 다분하다. 겸손은 약해서 나오는 게 아니다. 강할수록 겸손해져야 하고, 그 겸손이 권력의 강도를 더욱 높일 수 있다. 지지율이 낮은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지지율을 낮추는 근본 원인이 겸손의 결핍이라는 데 진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아직 취임 100일도 되지 않은 윤석열 정부다. 그 성패의 판단은 아직 이르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을 되쳐서 새롭게 국정을 펼쳐내고 싶다면, 대통령을 위시해 윤석열 정부 스스로 더 겸손해져야 한다. 권력은 국민과 역사 앞에 겸손할 때 되살아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