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을 단죄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

탈북자 강제 북송, 왜 중국을 따라했을까

최만섭 2022. 7. 23. 11:42

 

탈북자 강제 북송, 왜 중국을 따라했을까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2.07.23 09: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41회>

<1989년 5월 24일, 개인 날 톈안먼 광장에 고인 빗물에 민주 시민의 깃발이 반사되고 있다. 사진/Associated Press>

중국 당국, 목숨 걸고 북한서 탈출한 사람들 체포해 줄곧 강제 북송

1990년대 이래 중국 당국은 줄곧 목숨을 걸고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을 체포해서 북한으로 송환해왔다. 중국 당국은 탈북자의 난민 지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을 경제적 불법체류자로 분류하여 강제 북송한다. 그러한 행정 절차의 법적 근거는 1960년 북·중 사이에 체결된 “도주 범죄자 송환 조약” 및 1986년 체결된 “국가 안보 및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국경 협력 의정서”다.

물론 중국의 이와 같은 조치는 국제법상 반인류적 정치 범죄라 할 수 있다. 유엔은 1951년 난민 협약(Refugee Convention, 제네바 협약), 1967년 난민지위에 관한 의정서, 1984년 고문방지 협약에 따라 탈북자의 북송을 전면 금지한다. 북한으로 송환된 탈북자들은 십중팔구 구속, 고문, 성폭행, 강제노역, 처형 등 참혹한 인권유린을 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라디오 프리 아시아(RFA)>>에 의하면, 2021년 7월 14일 중국 당국은 팬데믹으로 북·중 국경이 막힌 지 1년 반 만에 버스 두 대에 남녀 탈북자 50명을 실어서 압록강 건너 북한의 신의주로 돌려보냈다. 단둥(丹東)에서 탈북자의 송환 과정을 지켜본 중국인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들을 다시 북한으로 돌려보내면 곧 처형될 수밖에 없다”며 큰 우려를 표현했다. 국제인권감시기구(Human Rights Watch)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현재 중국은 1170명의 탈북자를 억류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왜 중국 당국의 인권유린을 따라했을까

문재인 정권은 2019년 11월 2일 공해상에서 나포된 후 귀순 의사를 명백히 밝힌 탈북어민 두 명을 흉악범으로 몰아서 강제로 북송하는 놀라운 조치를 취했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바로 그 두 명이 선상에서 16명을 죽인 흉악범이라는 북한 측 주장을 맹목적으로 수용했다.

2022년 7월 18일자 <<조선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검역관의 선박 소독 과정에서 혈흔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같은 날 <<자유일보>>의 분석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길이 15미터의 오징어잡이 목선에 19명이 함께 타고 숙식하며 조업을 할 수가 없다. 탈북 어부 2명이 16명을 살해한 흉악범이라는 북한 측 주장은 거짓말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얘기다. 대체 왜 대한민국 정부는 물증도 없이 북측 주장만 믿고 두 사람을 살인마로 몰아 북송하는 반인권적 조치를 취했는가? 왜 또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이 귀순의사가 없었다고 거짓말을 했는가?

철저한 조사로 밝혀야 하겠지만, 지난 정권의 수뇌부가 1980년대 “민족해방노선”의 주사파 운동권 출신들로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할 수 없어 보인다. 그 당시 표현대로 “한번 주사(主思)를 맞은 자들은 영원히 수령님을 흠모하고 숭배하기” 때문이다.

마오와 김일성 이념에 오염된 주사파, 톈안먼 대학살 앞에서 ‘멘붕’

1980년대 후반 대한민국의 대학가는 공산세력의 해방구였다. 아니, 좌익소아병자들의 병동이었다. “운동의 대중화” 시대 마르크스-레닌은 신문화의 아이콘이고 마오쩌둥, 김일성은 아시아민중의 메시아였다. 대학 주변 서점가엔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좌익서적, 김일성을 찬양하는 북한 책들이 버젓이 진열돼 있었다.

그 시절 분위기를 한 시인은 버스 운전자가 핸들을 오른쪽으로 획 꺾으면 승객들은 왼쪽으로 휙 쏠릴 수밖에 없다고 풍자했었는데, 1987년 이후 한국정부는 오른쪽으로 돌아갔던 “핸들”을 이미 다시 왼쪽으로 돌린 후였다. 북한서적까지 모조리 공개해서 국민의 이념적 면역력을 높이자는 자유방임적 “반공” 전략이었다. 그럼에도 1980년대 말까지 한국의 대학가는 온통 공산주의 이념, 그 중에서도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좌익 민족지상주의 이념에 오염되어 있었다. 당시 대학가의 지식인들은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이념적 청맹과니들이었다.

<1990년 8월 연세대에서 열린 제1차 범민족대회. 북한 및 해외동포의 연계 하에 열린 이 대회는 90년대 주사파 운동의 중심이었다. 사진/중앙포토>

한국의 지식계가 끝없이 좌로, 좌로 행진하던 그 시절 그때 마른하늘의 청천벽력처럼 톈안먼 대학살이 벌어졌다. 자유와 민주를 외치던 대한민국의 소위 “진보세력”은 그 엄청난 사태를 보면서 “멘붕”에 빠졌다. 곧이어 동구권의 공산정권이 차례로 몰락하고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고 급기야 소련이 붕괴했을 때, 한국의 진보세력은 안절부절 밑천 털린 보부상처럼 절망의 나락을 배회했다.

“슬픈 중국”에서 구태여 1980년대 한국 좌파운동을 논하는 까닭은 1980년대 이후 전 세계는 이미 촘촘한 유기체의 시스템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각 지역 여러 국가 긴밀한 상호 영향 하에서 동시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바로 그 시절 “베이징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 센트럴 파크에 비를 뿌린다”는 이른바 “카오스 이론”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빌 게이츠가 “윈도우 95″를 들고 나와서 새로운 정보혁명을 선언하기 불과 수년 전이었다.

1989년 5월 ‘페레스트로이카’ 고르바초프의 방중...톈안먼 시위대 “환영”

1989년 5월 15일-5월 18일 베이징에서 중소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1959년 9월 흐루쇼프의 방중 이래 중·소 정상회담은 재개되지 않고 있었다. 이후 중·소 분쟁은 계속 격화되어 급기야 1969년3월 만주 우수리 강의 전바오(珍寶)도에서 군사충돌이 발생해서 거의 6개월 간 일촉즉발의 대결국면이 이어지기도 했다. 중·소 분쟁 사이에서 미국은 중국을 끌어안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중국이 소련을 등진 채 적극적으로 미국으로 향하는 중·소 분쟁의 신국면이었다.

전통적으로 소련은 미·중 사이에 쐐기를 박고 틈새를 벌여 공산권의 맹주로 군림하려 했다. 단적인 예로 1950년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유도해서 한반도에서 미국과의 전쟁을 성사시키는 군사·외교적 묘략을 펼쳤다. 돌이켜 보면, 미국의 대중국 포용정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스탈린의 생존전략에 미·중이 놀아났다고도 할 수 있다. 1964-1982년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 1906-1982) 집권기 소련은 이른바 “제한주권론”의 명분으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동맹군으로 체코를 침공해 프라하의 봄을 짓밟았고, 아시아 공산권 전체를 아우르는 안보 조약을 이루려는 강공 노선으로 일관했다.

 
<톈안먼의 ‘인민해방군,’ 1989년 6월. 사진/Sadayuki Mikami>

1985년 3월 집권한 이후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 )는 바로 그러한 구소련의 외교노선을 전면 수정했다. 그가 추진한 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구조 개혁)는 미국과의 군사·외교적 관계를 개선하고, 나아가 아시아 및 유럽과 관계 개선을 통해 소련 경제를 살리는 실용적 데탕트를 핵심으로 했다. 1986년 7월 28일 고르바초프는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을 통해 몽고, 동(東)러시아 및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대를 철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아울러 중국을 향해선 아무르와 우수리 강 유역 중국 측 강둑을 중·소 국경선으로 삼겠다며 러브콜을 보냈다. 곧이어 중국과 소련은 각각레닌그라드와 상하이에 각기 영사관을 설립했다. 1988년 7월 바르샤바 외교 회의에서 고르바초프는 미국을 향해 군비감축 협상을 제안했다.

<1989년 5월 15일-18일 방중 중에 양국의 국기 아래서 연설하고 있는 고르바초프의 모습. 사진/Associated Press>

급기야 1989년 5월 15-18일 양국의 사전 물밑 협의를 거쳐 고르바초프는 중국을 방문했다. 중공중앙은 톈안먼 시위를 싹 정리하고 광장에서 성대한 환영식을 거행하려 했지만, 그 계획은 공항의 약식 환영식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었다. 덩샤오핑과 고르바초프는 사전 조율에 따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양국의 국교 정상화를 선언했고, 중국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 1919-2005)과 고르바초프는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의 당 대 당 관계의 회복을 확인하긴 했는데······.

표현과 언론 자유 확대하고 경제 분권화 추진한 고르바초프...중·소 관계 난기류

톈안먼 광장의 시위가 더욱 거세지자 중·소 관계엔 미묘한 난기류가 흘렀다. 덩샤오핑은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괴뢰처럼 지배하고 있다며 베트남을 압박해 철군시키라고 요구했지만, 고르바초프는 내정일 뿐이라며 간섭을 거부했다. 고르바초프는 일단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선 판단 중지를 선언했지만, 광장의 시위대는 고르바초프를 “민주주의의 대사”라 부르며 그의 방중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 당시 상황에서 고르바초프의 글라스토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가 톈안먼 민주화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중·소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뻔히 아는 사실이었다.

고르바초프는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확대하고 경제적 분권화를 추진한 소련 해체의 주역이었다. 그는 동구의 몰락에 군사적 개입을 거부했고, 아울러 독일의 통일을 방치했다. 또한 그는 1989-90년 동구의 공산국가들이 민주화를 이룰 때 무력으로 진압하는 구소련 공산제국주의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그는 냉전을 종식하고, 군축을 개시하고, 소련의 정치적 자유를 확대한 공로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무엇보다 그는 1991년 12월 25일 공식적으로 크렘린에서 소련 깃발을 내리고 러시아 깃발을 올린 그 인물이었다.

<톈안먼 광장에서 “글라스노스트” 러시아어 플래카드를 들고 고르바초프를 환영하는 시위 군중. 사진/https://www.balticasia.lt/en/straipsniai/tiananmen-square-protests-2/>

톈안먼 광장의 대학생들 “자유 아니면 죽음을!”...민주 압살한 중국공산당

고르바초프 방중을 전후해서 톈안먼 광장의 대학생들은 더욱 기민하게 국제정세의 변화를 감지했다. 그들은 외신 기자를 향해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자유가 아니면 죽겠노라!”의 구호를 들이대며 공산권에 몰아닥친 자유화의 훈풍을 호흡했다. 지나서 보면, 바로 그때 광장의 대학생들이 가장 정확하게 세계사의 도도한 물결을 타고 있었다.

1989년 벽두부터 동구에서 일어난 자유화의 물결은 거대한 해일로 일어나 공산권의 독재정권을 뒤흔들고 있었다. 폴란드와 헝가리에선 엘리트 주도의 선거개혁으로 공산주의 압제가 종언을 고했다.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선 도도한 민중의 봉기 앞에서 독재정권이 무릎을 꿇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1년 12월 26일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 연방이 해체되었다. 요컨대 톈안먼 민주화 운동은 냉전이 종식되고 공산주의의 망령이 퇴각하는 세계사의 큰 변화 속에서 일어난 국제적 사건이었다.

<1991년 11월 13일 베를린에서 베를린 장벽과 함께 파괴된 레닌의 동상. 사진/Patrick Piel/Gamma-Palph>

그 순간 전 세계 인류를 통합하는 위대한 이념은 자유, 민주, 인권의 세 키워드로 압축되었다. 자유의 깃발은 공산 전체주의의 견고한 둑을 깨는 날카로운 창이었다. 민주의 깃발은 독재 권력의 손발을 묶는 굵은 밧줄이었다. 인권의 깃발은 인간을 압살하는 낡은 이념, 헛된 약속, 거짓 유토피아의 망념을 깨부수는 거대한 망치였다.

중국, 북한, 남한 주사파의 반인권 삼각연대... 동아시아 문명사의 흑암(黑暗)

중국의 민중은 비로소 동구와 구소련의 민중과 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유의 칼을 들고, 민주의 밧줄을 쥐고, 인권의 망치를 휘두르며 인류의 이름으로 중국공산당을 압박했다. 그렇게 위대한 중국 인민의 각성과 기의(起義)를 중국 밖의 세계 시민들은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해 5월 말 계엄령이 떨어지고 제1차 병력의 투입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세계 시민들은 안도의 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중공중앙은 결국 가장 야만적인 방식으로 자유를 배신하고, 민주를 압살하고, 인권을 유린했다. 오늘날 전 세계의 골칫거리가 된 “중국 문제”의 뿌리는 일차적으로 1989년 6월 4일 대학살에 닿아 있다.

톈안먼 대학살을 행한 중공 정부가 탈북자를 잡아서 북송해온 바로 그 정권이다. 북한 정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탈북자를 북송한 대한민국 지난 정권의 핵심부는 1980년대 마오쩌둥과 김일성을 숭배했던 바로 그 집단이다. 중국과 북한과 남한 주사파의 반인권 삼각연대, 동아시아 문명사의 흑암(黑暗)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