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朝鮮칼럼 The Column] 청년 여성 정치의 가능성 보여준 박지현의 ‘불꽃’

최만섭 2022. 5. 31. 05:13

[朝鮮칼럼 The Column] 청년 여성 정치의 가능성 보여준 박지현의 ‘불꽃’

‘n번방’ 폭로한 26세 여성
거대 야당 비대위원장 됐지만
누구의 아바타이길 거부하며
광기·차별·혐오 만연 정치권 비판
선거 후 운명 안갯속이지만
‘여성 정치’의 희망 보여줘

입력 2022.05.31 03:20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대국민 호소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국회사진기자단

스물여섯 살 박지현이 지난 1월 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선대위에 합류했을 때, 2030 여성 표를 노린 청년 정치인의 영입이라고만 생각했다. 대선 패배 다음 날 그가 공동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됐을 땐 파격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민주당 특유의 ‘정치쇼’라고 여겼다. ‘N번방 사건’을 최초 보도한 주역이지만 정치 경험은 ‘1도’ 없는 20대 여성이 거대 야당의 구심점이 될 거라 기대한 사람은 없었다. 안팎으로 ‘권인숙의 아바타’란 소문도 파다했다. 그에게 정계 입문을 권유한 이가 권인숙 민주당 의원이었다.

그러나 박지현의 행보는 예상을 빗나갔다. 누구의 아바타도 아닌, 당에 균열을 내는 방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안희정 부친상에 화환을 보낸 문재인 전 대통령을 공사를 구분 못한다 비판하고, 조국·정경심 부부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했으며, 민주당이 총력을 다해 추진하던 ‘검수완박’에 “과연 국민의 최고 관심사인가” 쓴소리 했다. 최강욱 의원의 ‘짤짤이’ 발언에 대해서는 “당이 성폭력 사건으로 고통을 겪었는데도 (징계를) 미룬다” 개탄했고, “국민의 신뢰 회복을 위해 586 정치인은 용퇴해야 한다”고 몰아쳤다.

할 말은 하는 이 20대 여성 정치인의 당돌함은, 그러고 보니 낯선 게 아니었다. 본지 기획 ‘2022 다시 쓰는 젠더리포트’를 준비하면서 인터뷰한 20대 여성들은 수많은 ‘박지현’들 중 하나였다. 호전적이고 정치적인 이들은 지난 대선 때 “박지현을 지키기 위해”, “여성가족부 폐지와 성범죄 무고죄 강화를 막기 위해” 차악인 이재명 후보에게 전략투표 했다고 말했다. 형수 욕설, 살인자 변호 논란이 있는 후보보다 아내 위해 요리하는 후보가 친여성적인 것 아니냐는 질문엔 발끈했다. “대통령 뽑지 요리사 뽑나요?” “아내 위해 요리하면 뭐하나, 국민 절반인 여성을 존중할 의사가 없는데” “두 후보 흠결이 도긴개긴이라 공약과 토론회를 보고 결정했다.”

이들이 이재명 후보의 팬덤인 ‘개딸’들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본지와 인터뷰한 20대 여성 중 ‘개딸’을 알고 있거나 지지한다는 응답자는 두셋에 불과했다. 오히려 “팬덤 정치는 무지성의 극치”, “아이돌 연예인처럼 정치인을 우상화하고 상품화하는 건 정치를 저급하게 만드는 지름길”, “개딸이란 말 자체가 여성을 멍청하거나 감성적으로만 여기는 혐오”라고 일갈했다.

 

최근 넷플릭스가 공개한 다큐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는 20대 여성들이 왜 박지현을 지키기 위해 결집했는지 보여준다. ‘추적단 불꽃’에서 ‘불’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박지현은 친구 ‘단’과 함께 스펙을 쌓기 위한 탐사보도 공모전을 준비하다 ‘텔레그램 n번방’이라는 지옥을 발견한다. 여중생을 성착취하는 다큐의 도입부만 봐도 끔찍한데, 두 사람은 무려 6개월 동안 수사 단서와 증거가 될 화면들을 캡처하며 경찰과 공조한다. 불꽃이 폭로한 디지털 성범죄 현장은 2030 여성들을 정치세력화하는 분기점이 됐다. N번방 방지법 청원이 국회를 통과했고, 이들을 주축으로 여성의당이 창당됐다. 박지현은 비대위원장이 된 직후 인터뷰에서 “N번방 방지법이 생기고 양형도 강화됐지만 피해자들의 일상은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우리 목소리를 저 위에까지 전달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정치권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더 깊은 민주주의, 더 넓은 평등을 위해 타오르는 불꽃이 되겠다”던 소신은 반년도 안 돼 위기에 직면했다. 불과 넉 달 전 송영길 대표가 “민주당의 반성과 쇄신이 미흡했다. 이제 (586 기득권은) 광야로 나설 때”라고 선언했을 땐 침묵했던 이들이, 똑 같은 말을 한 박지현 위원장에겐 내부 총질이라 비난하며 끝내 사과시켰다. “곳곳이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는 청년 정치인의 다음 행보는 어디로 향할까.

박지현과 N번방을 함께 추적한 ‘단’은 본지와 통화에서 “(박지현은)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 극성 지지층을 ‘폭력적 팬덤’이라 비판한 것에 대해서도 “강단 있고 솔직한 그답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안 하고 못 했을 것”이라고 했다.

6·1 지방선거는 박지현의 운명도 좌우할 것이다. 한철 이용되고 버려질 소모품이 될 가능성도 높다. 벌써부터 지도부 책임 운운하는 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박지현의 ‘한철’은 우리 정치판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청년 여성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광기와 차별, 혐오에 익숙해져 아무도 맞서려 하지 않았던 벽을 그가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