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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희의 커피하우스] 우리 모두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위하여

최만섭 2022. 5. 27. 05:28

[박성희의 커피하우스] 우리 모두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위하여

입력 2022.05.27 03:00
 
 
 
 
 

그게 뭐라고 그동안 그렇게 맞섰을까. 합창이냐 제창이냐를 놓고 그동안 온갖 촌극을 연출했던 5·18 기념식에 보수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민주의 문’으로 입장해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엉킨 실타래를 자르고 매듭지었다. 기념사는 “우리 모두가 광주 시민”이라는 새로운 좌표를 제시하며 광주의 정신을 자유, 민주, 인권의 보편적 가치로 끌어올렸고, 덩달아 ‘임을 위한 행진곡’은 누구나 힘차게 불러도 좋을 노래로 위상이 달라졌다. 윤 대통령이 한 일은 ‘임’을 재정의(redefine)해준 것이다. 단어의 궤도를 수정해 문제를 해결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림=이철원

‘임을 위한 행진곡’이 그동안 광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임’의 종북(從北) 혐의 때문이다. 알려지기로는 북한에서 이 노래를 1991년 황석영-리춘구 공동 집필로 제작한 영화 ‘임을 위한 교향시’에 배경음악으로 사용했고, 북한의 혁명 가요집에도 실려 있다고 한다. 이 곡이 8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애국가를 대체하는 혁명 선동가로 애창되며 각종 시위대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건 익히 알고 있는 바다.

일부에선 이 곡을 국가 기념곡으로 지정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는데, 기념곡이 되면 초·중·고교 음악 교과서에도 실려 차세대 투사를 양성하는 의식화 교육의 주제곡으로 쓰일지 모른다는 우려가 자연히 뒤따랐다. 사정이 그러하니 1997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정부 공식 행사로 지정되면서 8년간 제창되다가 2009년 공식 행사 지위에서 내려오며 제창 아닌 합창으로 대체되었고, 2011년 공식적 지위는 회복했으나 제창은 불허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 후 행사 때마다 보훈처장이 쫓겨나고 총리는 입을 다무는, 불편한 장면이 언론을 장식하곤 했다. 윤 대통령이 한 일은 그런 ‘임’의 좌표를 북한에서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린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임’의 좌표를 바꿨다기보다는 새롭게 주장했다는 표현이 맞는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무엇을 상상하며 부르는지, 무슨 수로 알겠는가. 다만 앞으로는 자유 민주 같은 대한민국의 보편적 가치를 상상하자는 윤 대통령의 희망이 반영된 기념사요, 제창이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람의 사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으며, 현실 또한 그렇게 만만치 않다. 당장 각기 다른 ‘임’을 추종하는 정치권의 분열된 지형이 대한민국을 탁류처럼 휘감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는 끝났지만, 은밀하고 속 깊은 문화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 최전선에 단어를 약탈하고 왜곡하고 물타기하는 프레임 전쟁이 있다. 권력은 놓쳤지만 새로운 권력에 결코 동의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저항 언어가 공론장을 맴돈다. 대선 결과에 불만인 사람들이 ‘석렬하다(망칠 것을 예상했으나 정작 망친 뒤 애석함을 담아 평가하는 말)’는 신조어를 네이버 오픈사전에 올리자, 반대편 지지자들도 ‘재명하다(너그러워 보이지만 속은 얍삽하고 오만하다)’는 또 다른 신조어로 맞받았다. 정치 신조어 사전에서 ‘정숙하다’는 ‘관광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비방을 목적으로 만든 이런 단어가 네이버 오픈사전에 정식 등재될 가능성은 없으나,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듯, 사전에 없는 단어라고 쓰이지 말란 법이 없다.

 

사람의 이름(고유명사)을 보통명사화한 이런 말을 엔도님(endonym)이라고 하는데, ‘색소폰’ ‘니코틴’ ‘쇼비니즘’ ‘디젤’ ‘린치’ ‘고어텍스’ 등이 모두 사람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만 서양의 ‘엔도님’이 사물에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는 데 비해, 우리나라의 ‘석렬하다’ ‘재명하다’ 같은 말은 멀쩡한 인간을 비방과 혐오의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특성을 보인다. 갈등 전문가에 따르면 상대의 ‘비인간화’야말로 극도의 적대와 갈등 상황의 표상이다. 상대가 맘에 안 드니 취임한 지 불과 며칠밖에 안 된 대통령의 근무지와 출근 시간을 트집 잡고, 일상의 나들이조차 꼬투리를 잡는다. 새 정부는 출범했지만 이런 혐오와 적대 문화는 매양 그대로다.

우리 공론장은 이런 적개심 가득한 언어로 어지럽다. 남의 말을 가져다가 되치는 말로 뒤바꾼 대표적인 말이 ‘적폐’다. 원래 박근혜 대통령이 한 이 말을 반대파가 박근혜를 옭아매는 용어로 활용했고, 성공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사의 키워드 중 하나인 ‘반지성’도 그렇다. 퇴임 후 양산에 내려와 시위대의 소란을 접한 문 전 대통령은 “확성기 소음과 욕설이 함께하는 반지성이 작은 시골 마을 일요일의 평온과 자유를 깨고 있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그에게 지지자의 소리는 ‘양념’, 비판자의 소리는 ‘반지성’인 것이다.

필요하면 창의력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그런 단어로는 ‘피해 호소인’이나 ‘성 비위’를 따라올 게 없을 것 같다. 성범죄를 성범죄라 부르기 싫고, 피해자의 피해를 인정하기 싫은, 의지적 표현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범죄 수위를 가늠하기 힘든 ‘성 비위’라는 말로는 상대를 얼마나 비난하고 벌 줘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다. 아마 그게 목적이었을 것이다.

잊힌 대통령이 되고 싶다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거하게 연출한 퇴임식을 가졌고, 사저로 내려간 후에도 크고 작은 일상을 소셜미디어에 지속적으로 뿌렸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 추도식에 참석한 후에는 “깨어있는 강물이 되어 결코 바다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유적 메시지를 던졌다. 잊히지도, 물러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 레토릭의 행진이다. 윤석열 정부는 이런 갈라진 땅에서 우리 모두의 ‘임’을 구하고, 마침내 하나 된 대한민국을 지킬 문화적 근육이 준비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