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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의 문화一流] 아프리카의 聖者 슈바이처, 의사 이전에 탁월한 바흐 연주가였다

최만섭 2022. 4. 27. 05:19

[박종호의 문화一流] 아프리카의 聖者 슈바이처, 의사 이전에 탁월한 바흐 연주가였다

입력 2022.04.27 03:00
 
 
 
 
 

요즘 봉사활동을 펼치는 훌륭한 의사 선생님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런 분들을 우리는 ‘몽골의 슈바이처’나 ‘소록도의 슈바이처’ 등의 말로 부르곤 한다. 이렇게 슈바이처는 봉사하는 의사를 일컫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진짜 슈바이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아동용 위인전 외에는 그에 대해 더 이상 읽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슈바이처는 바흐협회가 연 콘서트에서 오르간 연주를 도맡을 정도로 탁월한 바흐 연주자로 평가받았다. 그는 음악가, 목사, 교수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도 아프리카 의료 봉사의 꿈을 품고 의학 공부에도 뛰어들었다. 왼쪽 사진은 슈바이처가 1952년 오르간 연주를 하는 장면이다. 가운데 사진은 딸 레나와 함께한 슈바이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슈바이처가 연주한 바흐 오르간 앨범. /게티이미지코리아·독일 알베르트 슈바이처 센터(DASZ)·EMI Classics

대부분의 사람들은 슈바이처가 의사였으니 의술을 베풀고자 아프리카로 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전후 관계는 이와 다르다. 슈바이처는 목사로 유명했으며 대학의 신학 교수이기도 했다. 더욱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가 음악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유럽의 정상급 오르간 연주가였으며 음악학자로서 음악에 관한 여러 저작을 내기도 했다. 그는 음악가 바흐에 관한 한 당대에 가장 중요한 연주가이자 학자였다. 그렇게 목사며 교수이자 동시에 음악가였던 슈바이처가 남은 생애를 아프리카 봉사로 채우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는 의술을 베풀기 위해 의사가 되려고 뒤늦게 의과대학에 진학한 것이다.

즉 슈바이처에게는 의업이 목적이 아니라 봉사가 목적이었고, 그 수단으로서 의술을 택했다. 그리고 그는 의업을 통해서는 어떤 돈도 벌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렇다면 슈바이처는 의료 봉사에 들어갈 경비를 어떻게 마련했을까? 물론 그의 활동이 널리 알려진 나중에는 많은 후원금도 들어왔다. 그러나 초기에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와 유럽을 오가며 많은 강연과 연주를 했다. 그의 봉사 경비는 강연료와 오르간 연주의 수익에서 나왔다.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1875~1965)는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으로 알려진, 독일과 프랑스가 국토 분쟁을 벌이던 알자스 지방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양가 모두 대대로 목사 집안이었다. 특히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뛰어난 교회 오르가니스트이기도 했다. 슈바이처는 다섯 살 때 외할아버지가 물려준 작은 피아노로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여덟 살에 오르간을 배우고 교회에서 오르간을 치기 시작했다.

슈바이처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진학하여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다. 또한 그는 파리에서 오르간의 대가 샤를마리 비도르(Charles-Marie Widor)에게 오르간을 사사한다. 특히 바흐의 오르간 음악을 깊이 연구해 바흐 음악의 권위자가 된다. 그러면서 그는 철학박사와 신학박사 학위도 취득한다. 그는 모교의 신학부 교수가 되고 동시에 스트라스부르의 성 니콜라 교회에 부목사로 취임한다.

그가 아프리카로 간 것은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소망이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그는 가난한 목사의 아들인 자신보다도 더 힘든 생활을 하는 급우들이 많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빈곤하고 비참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나만 행복하게 사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라는 인식으로 발전했다. 그러던 그는 스물한 살이 되던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이렇게 결심한다. “나는 30세까지는 내가 좋아하는 신학과 음악을 위해 살고, 이후 30년은 남을 위해 살겠다.” 그리고 30세가 되던 해에 “나는 아프리카로 갈 것이며, 그것을 위해 의대에 들어갈 것이다”라는 계획을 편지로 써서 주변 사람들에게 일일이 부쳤다. 공개 선언이었던 것이다.

 

이미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교수였고 두 개의 박사 학위를 가진 슈바이처는 30세에 같은 대학의 의학부에 입학했다. 교수가 자기 학교의 학생이 된 셈이다. 의대 공부는 힘들었지만, 그는 신학부 교수직도 목사직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의학 공부를 하며 매주 신학 강의와 교회 설교를 준비하는 고투가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음악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1905년에 파리에 바흐협회가 창설되었는데, 이곳의 주요 콘서트에서 오르간 연주는 가장 탁월한 슈바이처가 맡았다. 그는 파리의 콘서트가 끝나면 밤 기차로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오면서 설교 준비를 하고, 다음 날 아침에는 의대 수업에 참석하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여러 일을 한꺼번에 해내었다.

슈바이처는 7년에 걸쳐서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까지 마친다. 1912년에 그는 사람들이 우러르는 두 직업, 스트라스부르 대학 교수직과 성 니콜라 교회 목사직을 모두 사임했다. 슈바이처에게 큰 힘을 준 것은 아내의 지지였다. 헬레네는 남편이 의대에 다니는 동안에 간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그를 도울 준비를 마쳤다. 슈바이처는 유럽에서의 안락한 생활과 보장된 미래를 접고, 자신의 도움이 가장 필요하다고 판단한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리고 1913년부터 아프리카에서 성자와 다름없는 봉사 생활이 시작된다. 슈바이처는 자신의 사상을 담은 몇 권의 책을 써냈다. 그런데 그가 음악에 관한 서적들도 남긴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바쁜 와중에 ‘바흐 오르간 작품집’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등을 출간했다. 바흐와 오르간에 관한 명저들이다. 슈바이처가 바흐의 오르간 곡들을 연주한 음반도 남아있어, 지금도 듣는 사람의 가슴을 감동으로 채운다.

슈바이처는 자신이 세운 아프리카 랑바레네 병원에서 고단하지만 보람찬 90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남은 30년 동안 남을 위해서 봉사할 것을 기도했던 그에게 하느님은 두 배인 60년을 허락해주었던 것이다. 슈바이처는 평생 그의 마음속 동반자였던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숨을 거두었다. 당시 바흐 음악을 연주한 이는 바흐의 유일한 혈육인 딸이었고, 딸이 연주한 작은 오르간은 파리 바흐협회에서 아프리카로 슈바이처에게 보내준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