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우리에게는 조국이 없어!”
한국인의 피는 더럽고, 한국인은 범죄자, 피의자, 비위생적 존재이다. 아직도 국민 일부가 이렇게 생각하는 나라가 있다. 일본이다. 소설·드라마 ‘파친코’는 그런 일본에서 60여 년, 4대를 견뎌 온 재일 교포 가족의 이야기이다.
20세기 초부터 여러 경로로 일본에 건너간 한국인 이주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파친코’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유미는 오사카 최악 빈민가에서 살았다. 방 한 칸뿐인 판잣집에서 돼지·닭 등 가축과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매춘부였고, 아버지는 주정뱅이였다. 그들의 책임만은 아니었다. 한국인은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없었다. 한국인은 가치 없는 인간이며, 더럽고 위험하고 천한 일에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야쿠자가 되든가 파친코업에 종사하면 그 곤경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었다. 야쿠자는 한국인을 받아주었고, 가난과 범죄 냄새가 나는 파친코업은 일본인이 기피했다. 일본인에게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는 곧 파친코다.
‘파친코’를 쓴 이민진은 1976년 일곱 살 때 미국에 이민 갔다. 재일 교포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 3학년 때였다. 일본에서 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한 재일 교포 중학생의 죽음을 들었다. 그 학생의 졸업 앨범은 욕설로 더럽혀졌다. “방귀 냄새 나는 가난한 인간들” “조선인은 문제아에 돼지들이야. 지옥으로 꺼져버려.” “할 수만 있다면 네 머리를 직접 베어버리고 싶지만 내 칼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그는 결국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죽음도 아무 소용 없었다. 절망한 그 학생의 아버지는 일본인 형사에게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어, 그런 소리만 항상 하죠”라고 절규한다. 죽음은 그들의 삶 곁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파친코’의 주인공들이 이 죽음을 이겨낸 방식은 각기 다르다. 주인공 선자는 아들 노아·모자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아이들을 향한 사랑은 그녀의 생명이자 죽음이었다. 선자의 남편인 목사 백이삭에게는 신이 있었다. 그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했다. 노아의 생부이자 선자의 첫사랑인 고한수는 야쿠자 보스였다. 모자수는 파친코로 큰돈을 벌었다. 자식, 신, 권력, 돈이 각자의 버팀목이자 탈출구였다. 이들의 공통점도 있다. 모두 일본인이 되기를 포기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노아는 완전한 일본인을 꿈꾸었다. 그는 학업에 매진했고, 흠 없이 처신했다. 일본인 교사들은 그를 ‘한국인의 자랑거리’로 칭송했다. 그는 기적처럼 와세다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꿈은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고한수가 생부라는 사실을 알았다. 학비는 그의 돈이었다. 노아에게 야쿠자는 일본에서 가장 더러운 인간이었다. 엄마가 자신을 더럽혔다고 생각한 그는 학교를 중퇴했다. 지방으로 잠적하여, 평범한 일본인으로 살았다. 16년 뒤 마침내 선자가 노아를 찾아간 날 저녁, 그는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한국인으로 사는 것은 끔찍했다.
그들은 왜 일본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나? “나 같은 조선인들은 이 나라를 떠날 수도 없어.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소리를 듣고. 대체 우리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공포에 떨고 있어.”(모자수)
‘파친코’는 20세기 한국인의 수난사를 그렸다. 하지만 조국이나 민족을 말하지 않는다. 아니 조국을 잃어버린, 조국 없는 사람들 이야기이다. 주인공 선자는 부산 영도의 가난한 어부 딸이고 무지렁이다. 자식에게 뼈와 살을 아낌없이 내준, 전형적 한국 어머니다. 하지만 ‘파친코’는 한국을 넘어서 있다. 재일 한국인에게 인간은 끔찍한 존재다. 살아가는 건 더러워지는 것이다. ‘파친코’는 그 운명을 견디며, 마침내 한 송이 꽃을 피워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일본인에게 ‘파친코’는 불편하다. “우리는 진정한 역사를 알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오직 거짓으로 점철된 역사를 주장한다. 전후에 많은 한국인, 러시아인, 그리고 미국인은 일본에서 민간인들을 강간하고 학살했다.” 재미 일본계 작가의 ‘요코 이야기’는 무한 반복된다. 하지만 ‘파친코’는 누구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 상처를 먼저 보는 것, 거기에 한국과 일본,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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