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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칼럼 The Column] 링컨의 대선 승리법

최만섭 2021. 11. 20. 04:59

[朝鮮칼럼 The Column] 링컨의 대선 승리법

강력한 후보 꺾은 무명 링컨
지지를 고민하는 사람들 내 편으로 만드는 데 주력
집권 후엔 라이벌과 정적을 내각에 임명해 국정 함께해
나라의 존망 걸린 이번 대선… 무엇인들 양보 못하겠나

김영수 영남대 교수·정치학
입력 2021.11.20 03:20
 
 
 
 
 
미국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에 있는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럼햄 링컨 상./게티이미지 코리아

1860년 5월 18일, 52세의 링컨은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큰 혼란에 빠진 국회는 휴회를 결정했다. 그는 말 그대로 무명이었다. 공화당을 지지하는 신문의 절반이 에이브러햄을 에이브럼으로 쓸 정도였다. 당초 뉴욕 주지사와 상원의원 출신인 60세의 수어드가 가장 강력했다. 그는 노예제 폐지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당파를 넘어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경선 결과는 링컨의 승리가 아니라 슈어드의 패배로 평가되었다.

링컨은 어떻게 후보 경선에서 승리했을까. 링컨의 경력은 초라했다. 변경의 통나무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짧고도 단순한 빈자의 연보’라고 축약했다. 정규 학력이라곤 1년도 안 되었다. 1860년 일리노이 공화당이 그를 대통령 후보로 뽑았지만, 링컨은 “예정된 운명을 기도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카고에서 열린 전국 전당대회에서 승리하려면 과반수인 233표를 넘어야 했다. 1차 투표에서 링컨이 1위가 될 가능성은 전무했다. 하지만 링컨을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아무도 그의 승리를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링컨은 이 약점에서 승리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링컨에게 장점이 있다면, 노예제에 대해 수어드보다 온건했다는 점이다. 수어드는 노예 해방이 헌법보다 더 높은 도덕률이며, 남부와의 대립이 “억누를 수 없는 갈등”이라고 주장했다. 링컨 역시 독립선언서의 천부인권을 지지했다. 그러나 흑인의 정치적, 사회적 평등이 즉각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또한 노예제의 확산에는 반대했지만, 남부 노예주의 권리를 인정했다. 원칙을 고수하되 현실과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는 것, 보수파도, 급진파도 아닌 정중앙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는 것, 그것이 링컨의 정치적 포지션이었다. 그런데 급진적인 슈워드가 후보가 될 경우 공화당은 과연 전국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노예주와 자유주의 접경에 있는 공화당 대의원단은 그 점을 걱정했다. 이들을 파고드는 것이 링컨의 핵심 전략이었다. “다른 사람을 공격하지 않고서, 그들이 첫사랑을 포기해야만 할 때 나에게 올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기적이 일어났다. 3차 투표의 격전 끝에 링컨은 2.5표 차로 과반을 얻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나의 첫 번째 지지자로 만들 것인가보다, 나를 지지하지 않지만 고민하는 사람을 어떻게 나의 지지자로 만들 것인가, 그 전략이 주효했다.

그것만으로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아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신문은 링컨을 ‘3류 서부 변호사’로 조롱했고, ‘개척지의 깡패’라고 비웃었다. 한 유력한 공화당원은, “지금은 무엇보다도 정치가가 필요한데 ‘울타리 가로장을 쪼갠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왔다”고 선거운동을 거부했다. 젊은 링컨은 한때 나무 쪼개는 일을 했다. 후보에 지명된 후 링컨은 당내 대선 후보 경쟁자 체이스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저는 전당대회 참석자 중 가장 비천한 사람인지라 모든 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슈워드였다. 링컨은 그의 선거 전략가 위드를 자신의 집이 있는 스프링필드에 초청했다. 그렇게 공화당은 ‘원 팀’이 되었다.

 

1860년 11월 6일, 링컨은 마침내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당시 미국은 노예제 문제로 분열되어 내전이 임박했다. 당선된 그날 링컨은 중압감에 눌려, “즉시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가 지기 전에 그는 내각 구상을 끝냈다. 종이에 적은 이름은 수어드, 체이스, 베이츠, 그리고 옛 민주당원인 몽고메리 블레어, 기디언 웰스, 노먼 저드였다. 모두 한때 그의 라이벌이거나 정적이었다. 이 이상한 내각에 대한 질문을 받자, 링컨은 “그들이 나라에 공헌할 수 있는 기회를 내가 빼앗을 권리는 없다”고 답했다. 모든 사람이 우려한 대로 그들은 내각에서 맹렬히 다퉜다. 하지만 남북전쟁의 내전에서 미국을 구하는 데 합심했다. 그리고 링컨이 암살되었을 때, 그들은 가장 많이 울었다. 링컨의 승리법은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얻는 데 있었다. 유권자 중에 그런 사람들은 대개 가운데 있고, 마음을 정하지 못해 머뭇거린다.

이번 대선은 ‘비호감도 올림픽’이라고 한다. 대권 주자들의 비호감도가 호감도보다 2배 정도 높다. 여당 강성 지지자들은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이명박근혜의 당을 지지할 수 있냐”고 한다. 하지만 중도층은 문재인 정부의 위선과 오만, 약탈에 질려 압도적으로 정권 교체를 원하고 있다. 그 바람에 부응하려면 원칙을 지키되 반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신중하게 현실과의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한때의 라이벌, 심지어 과거의 정적도 포용해야 한다. 1997년 대선 때, JP의 지지율은 5%에 불과했다. 그러나 DJ는 단일화의 조건으로 내각의 절반을 양보했다. 이번 대선은 늘 있는 대선이 아니다. 나라의 존망이 걸렸다. 상식과 공정이 되살아난 대한민국을 볼 수 있다면, 무엇을 버리지 못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