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실록 속으로] 세종 치세에 여진·일본·아랍인 귀화 행렬… 明도 조선을 경계했다
‘천하 인재 모은 강한 나라’ 꿈꾼 세종 “귀화인도 우리나라 백성”
경제·안보 이유 “쇄국” 주장 물리쳐… 倭·여진·남만 등서 귀화
明, 세종 이민족 포용 정책에 “여진족 조선에 기울면 큰일” 경계
입력 2021.09.07 03:00
“지금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여진, 동쪽으로 일본과 연결돼 있어 왕래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족류(族類)가 아니어서 필시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 것입니다[非我族類 其心必異].”
1446년(세종 28년) 5월 이선로(李善老)가 세종에게 ‘쇄국’을 제안하면서 올린 말이다. 그에 따르면 야인(野人·여진인)과 왜노(倭奴·일본인)가 왕래하면서 우리나라 기밀을 탐지하는 바, 그들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말아서 틈을 주지 말아야 했다. “일찍이 한나라가 했던 것처럼 국경을 닫고[閉關] 수어(守禦)의 방비를 엄히”하는 게 상책이라고도 말했다.
이선로가 보기에 당시 조정의 개방 정책은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 하나는 경제적 손해다. “해마다 흉년이 들어 나라에 저축이 없는” 실정에서 그들을 접대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고, “한정이 있는 물건으로 끝없는 요구에 응할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안보 문제다. 연이어 흉년이 들고 왕비까지 사망한 때를 틈타 외적이 침노할 우려가 있으니 “금년부터 야인과 왜노의 조공을 모두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선로의 주장이었다. 흥미롭게도 이선로의 주장에는 전형적인 ‘쇄국 논리’가 들어 있다. 경제적 이유와 안보상 이유는 17세기 병자호란, 그리고 19세기 개항기에도 똑같이 등장했던 논리다.
이선로의 주장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의정부 신하들이 모두 “남쪽 왜인과 북쪽 오랑캐 중에서 우리나라에 귀화한 자가 심히 많은데, 한나라처럼 국경을 닫아걸 수는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종 시대에 주변국 사람들이 귀화해 오는 일이 ‘심히 많았다.’ 세종 5년(1423년)을 전후해 “조선에서 살고 싶다”며 일본과 여진, 그리고 중국과 남만(南蠻) 지역 사람들이 떼를 지어 들어왔다. 어떻게 했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세종 시대 대외 정책은 ‘은혜와 위력의 병용[恩威竝用]’으로 요약된다. “은혜가 없으면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가 없으며, 위력이 없으면 그 뜻을 두렵게 할 수가 없다.”(세종실록 18년 11월 9일)는 말이 그것이다. 세종은 주변국에서 조공을 보내오면 받아들이고, 나라에 애경사가 있을 땐 예물을 주고받되, 국경을 넘어 약탈해 올 경우 ‘토벌’을 감행했다. 세종 초년의 ‘대마도정벌[東征]’이 그 예다. 세종 정부의 포용 정책은 주변국 사람들의 연이은 집단 귀화 현상을 초래했는데, 당시 명나라가 ‘조선이 장차 패권국이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할 정도였다. 1424년(세종 6년) 영락제 사망 소식과 함께 명나라 궁중이 조선을 경계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조선국은 임금이 어질어서 중국 다음갈 만하다” “요동(遼東)의 동쪽이 옛날에는 조선에 속했는데, 만일 요동 여진족이 조선에 ‘귀부’한다면 중국도 감히 항거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었다(세종실록 6년 10월 17일).
무엇이 이들을 물설고 말도 선 타국으로 위험을 무릅쓴 채로 떠나게 했을까? 세종은 첫째, 귀화한 사람들에게 집과 식량, 그리고 옷을 제공하는 한편 세금을 면제해 정착할 수 있게 했다. 귀화인은 정착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지원했다. 즉 생계 유지 단계, 우마를 기르는 단계, 그리고 “본국인과 같은 예로 대우”하는 단계가 그것이다.
둘째, 세종은 “귀화한 왜인들도 곧 우리나라 백성”이라며 귀화 외국인 차별을 금지했다. “오랑캐를 변화시켜 백성으로 만든다”는 정책 기조에 따라 세종은 귀화인들을 우리나라 사람들과 혼인해 살게 했을 뿐만 아니라, 벼슬을 주어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했다.
셋째, 연말연시에는 귀화인들을 위한 잔치를 열어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배려했다. 향수를 달래기 위해 귀화인 활쏘기 대회 및 모구(毛毬) 시합을 벌이기도 했으며, 정초의 조하(朝賀·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는 것) 때는 야인·왜인·아랍인[回回人] 등 귀화인들도 참석하게 했다. 귀화한 여러 인물, 예컨대 일본에서 귀화한 평도전이 매우 빠른 왜선(倭船)의 비밀을 전수하거나 왜구와 맞서 싸운 것은 그런 포용과 배려 때문이었다. 유명한 장영실 역시 중국에서 귀화한 집안의 후손이었다.
세종에게는 귀화인들을 포용하는 개방적인 정책으로 ‘작지만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비전이 있었다. 세종은 즉위교서에서 시인발정(施仁發政), 즉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키는” 임금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 어짊의 대상은 조선 백성에 한정되지 않았다. 조선을 찾아온 이민족까지 포용할 때 비로소 “천하의 인재들이 모두 그의 조정에서 벼슬하려 하며, 농사짓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들판에서 경작하려 하며, 장사꾼들도 모두 왕의 시장에 물건을 쌓아놓으려 하는”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 세종의 판단이고 신념이었다.
몇 년 전 예멘에 이어 최근 한국을 찾아온 미얀마와 아프간 난민들을 보며 세종의 포용 정책을 떠올린다.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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