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박종호의 문화一流] 칸딘스키는 떠났지만… 여인은 나치의 마수로부터 연인의 그림을 지켰다

최만섭 2021. 9. 6. 08:21

[박종호의 문화一流] 칸딘스키는 떠났지만… 여인은 나치의 마수로부터 연인의 그림을 지켰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

입력 2021.09.06 03:00

 

 

 

 

 

칸딘스키가 그린 젊은 날의 뮌터의 초상. 가브리엘레 뮌터는 화가 칸딘스키의 제자이자 연인이었고, 두 사람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작품 활동을 한 뮌헨의 집 ‘루센하우스’는 독일 표현주의 유파 ‘청기사파’의 산실이었다. /위키피디아

13년 전쯤 국내 유수 전시장에서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그런데 칸딘스키는 몇 점 되지 않았다. 다녀온 사람들은 “칸딘스키가 적어서 실망했다”거나 “그럴 것이면 왜 칸딘스키를 내세웠느냐?”고 말했다. 전시는 러시아의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회화들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중에는 칸딘스키에 못지않은 훌륭한 러시아 명화가 많았다. 그런데 칸딘스키를 부각하다 보니 정작 본래 취지였을 러시아 회화들은 뒤로 밀렸다. 그렇다면 칸딘스키의 그림은 왜 몇 점 없었을까? 어디에 있을까?

 

러시아 미술관에 칸딘스키가 없는 이유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20대에 모스크바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런 그가 30세에 인생 방향을 바꾸었다. 뮌헨으로 가서 미술을 공부하고 화가로 새 출발을 한다. 그리고 뮌터를 만난다.

가브리엘레 뮌터(Gabrilele Münter·1877~1962)는 베를린의 유복한 중산층에서 태어났다. 미국에서 공부했던 치과 의사인 아버지처럼 그녀는 자유로운 여성으로 성장했다. 그녀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여성을 받아주는 미술 학교가 없었다. 나체 소묘에 여성의 참여를 불허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러시아에서 온 칸딘스키가 팔랑스(Phalanx)라는 사설 미술 학교를 세워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그녀는 칸딘스키의 제자가 되었다. 칸딘스키는 유부남이었지만,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그들은 뮌헨 근교의 아름다운 마을 무르나우에 정착한다. 뮌터의 유산으로 구입한 집은 러시아 사람이 산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루센하우스(Russenhaus), 즉 ‘러시아인의 집’이라고 불렀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많은 그림을 그렸다. 칸딘스키가 스승이지만, 그도 뮌터의 영향으로 강렬하고 채도가 높은 색상을 애용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들은 연인이자 동지였다. 그러나 생활은 행복하면서도 갈등의 연속이었다. 재능 있는 여성도 남자의 성공을 위해서는 자신의 일을 포기하는 것을 당연시하던 시대에 뮌터는 늘 혼동되었고 힘들었다.

그들 집에는 뮌헨의 대표적 젊은 화가인 마르크, 마케, 클레 등이 자주 방문하였으며, 야블렌스키와 베레프킨 커플(2020년 6월 29일 A29면 ‘결혼한 적 없고 배신까지 했지만… 둘의 그림은 늘 함께 거론된다’ 참조)은 아예 이웃으로 이사를 왔다. 결국 뮌터와 칸딘스키를 중심으로 무르나우에서 펼쳤던 일단의 예술적 교류와 합의로 1911년에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적 유파 ‘청기사파’(靑騎士派)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뮌터가 그린 젊은 날의 칸딘스키의 초상(왼쪽)과 뮌터가 그린 아이히너의 초상. 혁명 러시아로 떠났던 칸딘스키는 독일로 돌아와 베를린 등지에서 추상화가로 명성을 얻으면서도 뮌터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뮌터는 나치가 퇴폐 미술가로 낙인찍은 칸딘스키의 작품을 압수 소각 위기에서 지켜냈고, 미술사학자 요하네스 아이히너(오른쪽)와 결혼한 뒤 함께 그녀의 옛 연인 작품을 연구하고 정리했다. /위키피디아·뮌터아이히너재단

 

‘청기사파’ 탄생한 뮌헨의 ‘루센하우스’

1914년에 칸딘스키는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뮌터는 자신을 ‘칸딘스키 부인’이라 부르며 기다렸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뮌터의 몸과 마음이 말라가듯 그녀의 그림도 어두워져갔다. 혁명 러시아의 환경에 순응하지 못한 칸딘스키는 독일로 돌아오지만, 이번에는 뮌헨이 아닌 베를린에 정착하고 뮌터에게 오지 않았다. 바우하우스 교수가 된 칸딘스키는 현대 추상화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며 크게 유명해진다. 그러나 그런 활약상을 뮌터는 신문을 통해서만 볼 뿐이었다. 그가 본처와 이혼하고 이미 재혼했다는 소식까지도.

 

나치가 집권하자 칸딘스키는 퇴폐 미술가로 낙인이 찍히고, 작품들은 압수되어 소각될 운명에 처했다. 그러자 뮌터는 무르나우 집에 남아있던 칸딘스키의 그림들을 압수와 폭격을 피해서 지하실에 몰래 보관하였다. 그녀가 숨긴 그림들은 그녀의 생명이고 애인이자 자식이었다. 힘들었던 뮌터는 미술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요하네스 아이히너(Johannes Eichner·1886~1958)와 결혼하면서 회복되어 간다. 두 사람은 무르나우에서 함께 칸딘스키의 작품들을 연구하고 정리한다. 그동안에 칸딘스키는 파리로 가서 세계적 추상화가로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다음 해에 전쟁이 끝났다.

1949년 뮌헨에서 열린 청기사파 전시회에는 뮌터가 보관한 칸딘스키의 그림 41점이 걸렸다. 뮌터의 작품은 9점이었다. 칸딘스키를 대신해서 참석한 아내 니나 칸딘스키는 남편의 상속인이자 청기사파의 집행자 역할을 했다. 그녀는 전후의 피폐한 뮌헨에 파리의 화려함을 과시했다. 니나는 뮌터에게 다가가서 그녀를 파리로 초대했다. “파리에 남겨진 그의 그림들은 당신에게 흥미로울 겁니다.” 뮌터는 대답했다. “저는 여행하지 않습니다….”

뮌헨 ‘루센하우스’의 아이히너와 뮌터의 사진(왼쪽)과 무르나우의 공동묘지에 있는 뮌터와 아이히너의 묘(오른쪽). /렌바흐하우스·위키피디아

 

렌바흐하우스엔 젊고 밝았던 뮌터의 그림이…

1957년 80세 생일을 맞아 뮌터는 보관하던 유화 80점과 드로잉 330점을 뮌헨의 미술관 렌바흐하우스에 모두 기증했다. 유명한 초상화가 렌바흐의 집이었던 렌바흐하우스는 지금 청기사파의 작품이 가장 많이 전시된, 그리고 젊은 날의 칸딘스키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근대 미술관이 되었다. 다음 해에 아이히너는 갑자기 죽고, 뮌터는 마지막 5년간 혼자서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가브리엘레 뮌터와 요하네스 아이히너 재단이 발족하고, 그들이 살던 집은 뮌터하우스라는 이름으로 개방되었다. 이 집은 뮌터와 그녀의 두 남자, 칸딘스키와 아이히너라는 세 미술가의 족적이 서린 유산이자 현대미술의 여명기에 바쳐진 기념비다.

최근 현대식으로 새로 확장한 렌바흐하우스에 가면 많은 청기사파 작품을 볼 수 있다. 그중에는 젊은 날의 칸딘스키와 뮌터의 화창한 그림들이 다시는 만나지 못했던 주인들을 대신하여 나란히 걸려 있다.

옛 ‘루센하우스’는 지금은 ‘뮌터하우스’(왼쪽)로 불리고, 뮌터가 그림을 기증한 뮌헨 렌바흐하우스 시립미술관(오른쪽)은 칸딘스키와 청기사파의 주요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위키피디아·렌바흐하우스

 

 

박종호 풍월당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