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90분만에 모인 1000만원··· 왜 이렇게까지 ‘혁신'에 반대하나?
경원중 사태로 본 혁신학교 딜레마
입력 2020.12.26 03:00
일러스트=안병현
‘개학 날이 기다려지는 학교, 신나는 학교, 밝고 웃음이 넘쳐나는 학교.’
서울시교육청 홍보 영상에 나오는 혁신학교에 대한 설명이다. 유년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꿈꾼 학교 모습이다. 부모도 마찬가지. 내 자식이 이런 학교 다니기를 원치 않을 이가 있을까.
이달 초, 서울 서초구 경원중학교에서는 조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학교 인근에는 ‘○○○(경원중 교장 이름) 죽어서도 너를 잊지 않겠다’ ‘혁신학교 필요 없다’ 같은 현수막 40여 개가 내걸렸다. 학부모뿐 아니라 인근 아파트 단지 주민까지 팔을 걷어붙였다. 혁신학교 지정에 반대하는 학부모 단체 채팅방에서 지정 철회를 위한 변호사비를 모금했는데, 90분만에 1000만원이 모였다. 주말엔 아버지들이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했다. 급기야 지난 7일에는 학부모 수백명이 모여 면담을 요구하자, 교장이 학교 밖으로 자정까지 못 나오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결국 지난 10일 경원중학교는 혁신학교 취소 결정을 공식 발표했다.
약 일주일간 벌어진 경원중학교의 혁신학교 지정 철회 과정을 보면, ‘목숨 걸고 반대한다’는 말을 절감한다. 경원중학교뿐 아니다. 지난 3년간 학부모·주민 반대에 부딪혀 혁신학교 추진이 좌초된 사례는 서울에서만 10건이 넘는다. 혁신(革新)이라는데,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반대하는 것일까.
◇왜 반대하나?
“집값요? 사실 경원중학교 보내는 사람 중에는 전세 사는 사람이 더 많아요. 공부시키려고 전세 온 거지, 집값 때문에 투자해서 오는 사람들 아니에요.”
서울 서초구 경원중 인근에 사는 초등학생 부모 박나연(가명·44)씨는 ‘집값 떨어질까 봐 혁신학교에 반대하는 것 아니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박씨는 이달 초, 경원중학교의 혁신학교 지정 반대 청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박씨는 “경원중이 혁신학교가 돼도 집값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며 “경원중학교 자리는 인근에 신세계백화점, 고속버스터미널 등이 있어 서초에서도 요지로 꼽힌다. 주변에 학력 수준 높은 고등학교도 많아 집값은 큰 반대 요인이 아니다”라고 했다.
학부모들의 조직력이 이 학교 전통에 기반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경원중 출신 김모(46)씨는 “한 반에 6~8명씩 서울대 보낸 중학교로 소문난 경원중 출신들이 현재 학부모가 됐다”며 “이들이 자녀를 혁신이란 이름으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좌파 교육의 희생양이 되지 않게 목숨 걸고 반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서울 혁신학교 현황
혁신 학교가 도입 초기부터 기피 대상이었던 건 아니다. 혁신학교는 2009년 이른바 ‘좌파 교육감’인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처음 도입했다. 지난 3월까지 전국에 1700여 곳이 생겼으며, 서울에만 226곳이 있다. 도입 초기에는 기존 학교 운영 방식과 달리 소수 인원을 대상으로 수업하고, 수업 시간도 60~80분으로 자유로우며, 강의식 수업 대신 토론·참여식 수업을 한다는 점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같은 아파트라도 혁신학교에 배정받는 동(棟)이 더 비싸게 거래될 정도였다. 초등생 딸을 혁신학교에 보냈던 김모(40)씨는 “독서나 체육 활동 등 혁신학교에서는 아이들이 활동할 시간을 충분히 보장해줘서 만족스러웠다”면서도 “중학교부터는 본격 대입 준비가 시작되는 만큼 상위권 대학 진학률 등의 지표가 더 중요해지니 고민이 됐다”고 했다.
실제 학부모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학력 저하’다. 2017년 10월 혁신학교의 학력 수준이 처음으로 구체적인 시·도 단위별로 공개됐는데, 당시 혁신고 학생들은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 평가에서 ‘기초 학력 미달’ 비율(11.9%)이 전국 평균(4.5%)보다 2배이상 높게 나타났다. 김경회 성신여대 교육학과 교수는 “혁신학교는 아이들의 학습 부담이 과도하다고 보고 학습 완화에 초점을 맞춰서 도입한 제도라, 기초 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일본도 이와 비슷한 ‘유토리 교육’을 우리보다 먼저 도입했다가 기초 학력이 저하돼 폐지했다”고 말했다.
학력 저하라고 단정하기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좋은교사운동 김영식 대표는 “학업 성취도가 더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했다. 실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2018년 발표한 ‘혁신학교 성과 분석 보고서’를 보면 혁신학교 학생들은 일반 학교 학생들보다 성적은 낮았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성장률은 더 높게 나타났다. 김 대표는 “학력이란 부분도 너무 좁게 해석되고 있다”며 “단순히 점수뿐 아니라 자기 주도 학습 능력이나 학습에 대한 흥미도를 함께 판단해야 한다. 혁신학교는 이런 부분에서 훨씬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 대한 반박도 있다. 전주 완산고 박제원 교사는 “보고서는 교사 수와 학생 수가 비슷한 집단 대신 ‘교사 수에 대한 학생 수 비율’을 기준으로 삼았는데, 이 경우 학급당 학생이 적은 집단(혁신학교)이 학업 성취도가 높은 것은 자명하다”며 “비율이 아닌 수로 따져야 정확한 비교가 가능하다”고 했다.
◇대안은?
지난 22일 서울시교육청은 경원중 앞에 모여 면담을 요구한 학부모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다고 밝혀, 학부모들이 다시 반발하고 있다. 광주교대 박남기 교수는 “만약 교육청이 혁신학교 가면 성적 떨어진다는 게 학부모들의 오해라고 생각한다면, 이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며 “‘학부모들이 몰라서 그런다. 믿고 따라와라’ 같은 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박제원 교사 역시 “혁신학교 정착을 위해선 반대 학부모를 수구 꼴통이나 경쟁·서열주의자로 몰아가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대학 입시 제도나 학벌주의 사회 등은 그대로 두고 단지 교육과정만 바꾸겠다는 태도는 비현실적이다. 차라리 대학 평준화의 길을 모색하는 데 더 많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다. 경기대 교육대학원 김대유 교수는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혁신학교가 학군 안에 있지만 이런 교육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학생은 다른 학교로 전학 갈 수 있게 하거나, 반대로 혁신학교를 원하는 학생들은 멀리서도 다닐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갈등 해결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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