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

바이든, 트럼프 딜레마

최만섭 2020. 11. 19. 05:13

바이든, 트럼프 딜레마

“전직 대통령 수사 원치 않지만, 검찰에 판단 맡기겠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입력 2020.11.19 04:02

 

 

 

 

 

17일(현지 시각)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당선인이 델라웨어 윌밍턴의 한 극장에서 외교·국방 전문가들과 화상회의를 하던 중 생각에 잠겨 있다. /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퇴임 후 각종 수사에 직면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국론을 분열시킬 수 있어 피했으면 한다”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 NBC방송은 17일(현지 시각) 바이든 당선인의 핵심 측근 5명을 인용, 바이든이 최근 이런 뜻을 강력히 피력했다고 보도했다. 그 이유는 바이든이 ‘분열된 나라의 치유와 통합’을 내건 상황에서, 패배한 전직 대통령이 옷을 벗자마자 수사받고 기소된다면 정파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또 자신의 핵심 정책을 추진해야 할 임기 초반이 트럼프 수사 논란으로 잠식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이는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버티는 트럼프가 바이든 측에 던진 무언의 ‘거래’ 요구를 바이든이 어느 정도 수용한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트럼프가 불복 주장을 계속하며 정권 인계에 나서지 않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퇴임 후 수사를 막기 위한 포석이란 관측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당선인이 17일(현지 시각) 델라웨어 윌밍턴의 퀸스 극장에서 국가 안보 참모진의 브리핑을 받고 나서면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그러나 이날 NBC는 바이든이 “모든 수사 관련 결정은 독립적인 법무부(검찰)에 맡기겠다”는 생각도 확고하다고 전했다. 바이든은 대선 전부터 트럼프 정권의 법무부가 대통령 사조직처럼 전락한 것을 비판하면서, 자신은 검찰 수사엔 일절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정부 관료가 법무부 업무에 개입할 경우 즉시 해고하는 내용의 행정명령까지 준비하고 있다.

이처럼 상호 모순된 두 가지 메시지가 동시에 나온 것은 바이든의 큰 고민을 보여준다. 우선 트럼프 수사를 피하고 싶다는 건 ‘더이상 트럼프 시대에 발목 잡히고 싶지 않다’ ‘트럼프를 찍은 국민 7300만명의 감정도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바이든의 진짜 속내라는 게 미 언론들의 공통된 해석이다. 트럼프 사면(赦免)은 바이든이 상원 의회를 장악할 공화당과의 협치를 위한 화합 카드로 쓰일 수 있다. 일각에선 트럼프가 수사받게 되면 바이든의 차남 헌터 관련 스캔들을 다시 꺼내 반격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했다는 말이 나온다.

 

특히 바이든은 미국 전직 대통령의 명예를 보호하는 전통을 지키고 싶어한다고 한다. 미국에선 선거 패자 쪽이 위법 혐의가 있더라도 실제 사법 처리까지 몰고가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민주주의’라고 여기는 정서가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1974년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하야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뒤이어 취임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사면한 것이다. 당시 닉슨이 탄핵은 피했지만 그의 불법 행위는 단죄해야 한다는 여론이 컸으나 포드는 ‘치유와 통합’을 내걸었다. 2008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조지 W 부시 공화당 행정부 인사들의 이라크전 획책과 포로 가혹 행위를 수사해야 한다는 민주당 내 주장을 무마했다.

 

그러나 현재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한 정계와 법조계에선 ‘트럼프에 대한 정치적 포용은 법치(法治) 파괴’란 주장이 만만치 않다. 트럼프가 직면한 수사 사안은 통치 행위 영역을 벗어나는 심각한 부패이거나, 사인(私人)으로서의 현행법 위반 혐의가 명백해 정치적으로 덮어주기 힘든 수준이라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17일 “트럼프를 기소·처벌하지 않고는 법치를 바로세울 수 없다”고 했다.

바이든이 연방 정부 차원의 수사는 어떻게든 제어하더라도, 뉴욕주 등이 주법(州法)으로 수사 중인 사안까지 막을 수는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뉴욕 맨해튼 지검의 경우 트럼프 가족 기업의 보험 사기와 탈세 혐의에 대한 수사는 상당히 진척돼 있으며, 그 아들들에 대한 소환장까지 발부돼 있다. 뉴욕 검찰은 트럼프가 내년 1월 20일 정오를 기해 민형사상 면책 특권이 없어지면 바로 소환할 수 있게 주 대법원 결정을 받아뒀다.

바이든이 “검찰 수사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은 것은 이런 현실을 고려한 것일 수 있다. 바이든이 법무장관으로 검토 중인 이들은 하비어 베세라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 제이 존슨 전 국토안보부 장관, 더그 존슨 상원의원, 샐리 예이츠 전 법무 차관 등이다. 이들은 다 트럼프 수사를 강력히 주장해왔다.

 

뉴욕=정시행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