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 칼럼] 트럼프 7000만표
트럼프가 퇴장해도
경제·마을 공동체 해체
가족 해체 문제는
미국 사회에 남아 있다
7000만표는
사표(死票)로 사라질
간단한 숫자가 아니다
입력 2020.11.11 03:20
미 CNN방송에 출연한 흑인 정치 평론가가 바이든 당선 확정 소식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상징적이었다. 트럼프 정권의 인종차별을 비판하던 그는 눈물을 닦으며 “아이에게 아버지 노릇 하기 쉬워졌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 노릇’에 대해 “사람 됨됨이와 진실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와 장단을 맞춘 CNN의 스타 앵커는 성(性) 소수자로 유명하다. 대리모를 통해 자식도 얻었다. 둘은 성과 인종에서 마이너리티에 속하지만 정반대 세상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흑인 평론가는 예일대 로스쿨 출신 엘리트 변호사다. 그와 예일대 동문인 앵커는 미국 유수 재벌 밴더빌트가(家)의 후손이다.
미국 언론을 접하면 트럼프는 악(惡)의 화신 같다. 그의 패배는 정의의 승리다. 트럼프가 앞설 때 절간 같았던 CNN 뉴스룸은 바이든이 승기를 잡자 시장처럼 변했다. 앵커의 목소리 톤이 올라가고 말이 빨라졌다. CNN 기자의 리포트만 들으면 이미 선거 다음 날 바이든은 조지아를 잡고 당선됐어야 마땅했다. 스포츠 편파 중계를 보는 듯하다. 미국 특파원 출신 선배가 말했다. “미국 언론, 저러다 또 큰일 내지 싶다.” 시청자는 평론가와 앵커에게 미국 사회 소수자의 얼굴만 보는 게 아니다. 흑인이든 게이든 명문대 출신 최고 엘리트의 위선을 동시에 읽는다. ‘나는 일자리를 걱정하는데 너는 아버지 노릇?’
지난 10월 31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버틀러 공항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유세에 모인 지지자들./로이터 연합뉴스
10일 현재 트럼프가 얻은 표는 7153만장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최고 득표 기록에도 앞선다. 역대 최다 득표 낙선 기록이다. 승자 독식 대통령제에선 의미가 없지만 트럼프는 4년 전 승리했을 때보다 855만표를 더 얻었다. 저 막돼먹은 대통령 트럼프에게 투표하는 7153만명은 모두 미국 중심주의자, 백인 우월주의자, ‘조 식스팩(Joe Six-pack)’으로 비하되는 백인 저임금 노동자일까. 4년 전 트럼프의 급부상은 트럼프가 백인 노동자와 미국 중심주의자의 분노를 동물적 감각으로 읽어낸 선동의 결과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면 급부상에 그쳤을 것이다. 그는 공화당 대선 후보를 차지했고 대선에서 승리했다. 천박한 언행과 정치 쇼로 4년을 보내고 비참하게 낙선하는 이 순간에도 미국 역사상 2위 득표 기록을 세우는 중이다.
한국에선 보수주의를 자유주의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공동체의 사회·도덕적 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전통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식민지⋅해방⋅분단⋅건국⋅산업화를 거치면서 공동체 대부분을 무너뜨렸기 때문에 전통주의 개념 자체가 흐려졌다. 전통주의 관점에서 보면 거의 모든 공동체를 해체한 한국은 진보를 넘어 혁명적이다. 전통주의를 빼고 보면 트럼프에 대한 7000만의 지지는 광신자들이 연출하는 정치 세계의 천박한 팬덤 현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무리 대국이라도 7000만표는 그렇게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지난 10월 31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버틀러 공항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유세에 참석한 지지자들./TASS 연합뉴스
선진국의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와 전통주의가 서로 모순을 극복하면서 절충하는 과정이다. 미국과 일본은 전통주의 관점에서 사소한 문제라도 끝없이 부딪치고 이야기를 만든다. 이런 사례들이다. 일본 아베 총리는 집권 후 심혈을 기울여 ‘반려견도 가족’이라는 교과서 문구를 없앴다. 아베 총리도 자식이 없다. 하지만 개가 가족으로서의 자식을 대체할 수 있다는 대안적 가족관을 거부한다. 전통적 가족의 해체와 대안적 가족의 구축을 동시에 시도한 일본 영화 ‘어느 가족’이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아베는 축전도 보내지 않았다. 미국 서부영화에서 카우보이나 보안관이 이방인과의 치열한 총싸움 끝에 지켜내는 것은 언제나 가족과 마을 공동체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밀러 대위가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병졸 한 명을 구해낸 것도 평범한 중산층 가족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신자유주의의 주도자이자 신자유주의의 이익을 가장 많이 얻은 나라다. 그에 대한 부작용으로 빈부격차가 더 벌어졌고 경제 공동체가 무너져 내렸다. 트럼프가 이들을 대변한 것은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공동체를 중시하는 보수주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이 점에서만큼 한국의 소위 진보는 트럼프를 존경해야 한다. 트럼프의 반(反)이민 정책과 인종·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행은 많은 문제를 낳았다. 하지만 트럼프가 사라지고 정책이 수정된다고 해도 이민 유입에 의한 마을 공동체의 해체, 성적 다양성에 따른 가족 해체 문제는 미국 사회에 남아 있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보수주의적 가치 역시 평가절하되지 않는다. 꼭 트럼프가 아니더라도 트럼프 현상은 재연될 것이다. 7000만은 사표(死票)로 사라질 수 있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선우정 부국장 편집국 부국장 겸 뉴스 총괄에디터
논설위원, 사회·국제·주말뉴스부장, 도쿄특파원
논설위원, 사회·국제·주말뉴스부장,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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