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한삼희의 환경칼럼] 태릉골프장에 꼭 아파트 지어야겠나

최만섭 2020. 8. 26. 05:47

[한삼희의 환경칼럼] 태릉골프장에 꼭 아파트 지어야겠나

조선일보

한삼희 선임논설위원

 

 

입력 2020.08.26 03:20

박정희는 그린벨트, 이명박은 청계천
빈 땅 아파트 채우기는 개발 시대 사고방식
왜 시대 거꾸로가나… 시민에게 공원을 선물하길

 

한삼희 선임논설위원

 

청계천 복원 공사는 2년 3개월 공사 끝에 2005년 10월 완공됐다. 공사 도중이던 2004년 4월 '청계천에서 새를 보고 싶다'는 칼럼을 썼다. 새가 날려면 가슴근육을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데 그 에너지를 대기 위해 많이 먹는다. 하천에 새가 날아든다는 것은 새의 먹이가 풍부하다는 뜻이고 그만큼 하천 생태계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요즘 청계천을 산책하면 거의 틀림없이 왜가리·백로·물총새 등이 물속에 다리를 박고 먹잇감을 노리고 있는 장면과 마주친다. 그것들이 때로는 하늘 높이 날기도 하는데 새가 빌딩을 배경으로 도심 하늘을 허우적허우적 나는 광경은 경이롭다. 청계천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생태적 도시 개조의 성공 사례다. 나 역시 광화문 직장인으로 '이명박 서울시장'이 이룬 업적의 혜택을 듬뿍 누리고 있다.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 하류 뚝섬의 옛 경마장 터가 116만㎡(약 35만평)의 서울숲으로 조성되기도 했다.

원로 환경운동가 박창근씨가 2014년 펴낸 '환경보호 대통령 박정희'라는 책에 그린벨트 첫 지정 때의 에피소드들이 담겨 있다. 1972년 7월 박정희 대통령이 부산 지역 그린벨트 지정 고시를 결재하면서 '고시 지역 해제 시에는 필히 대통령 재가를 득하여야 함'이라고 친필 부기(附記)를 한 문서의 사진이 그중 하나다. 그 시절 그린벨트는 대통령 직접 관장 업무였다. 당시 그린벨트 주무 부처인 건설부의 태완선 장관은 자기 소유 임야 5000평까지 그린벨트로 묶은 실무진의 지정안에 "별수 없지"라며 사인했다고 한다. 박창근씨는 그린벨트, 산림녹화, 공해방지법, 새마을운동 등 업적 9개를 예로 들며 박 대통령을 '환경보호 대통령'이라고 했다.

정부가 서울 노원구의 태릉골프장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집값 잡기의 일환이다. 골프장 83만㎡(약 25만평) 부지에 중소형 아파트 1만가구를 넣을 수 있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직전 "미래 세대를 위해 그린벨트를 해제하지 않고 계속 보존하겠다"고 했었다. 당장 '태릉골프장도 그린벨트인데 강남 그린벨트는 보호하고 강북 그린벨트엔 집 짓자는 거냐'는 반응이 나왔다. 사실 그린벨트 중에는 비닐하우스, 무허가 작업장이 난립한 곳이 적지 않다. 그러나 태릉골프장은 1966년부터 군 골프장으로 가꿔온 녹지다. 서울 동북권엔 이렇다 할 대형 공원도 없다. 주변 일대엔 이미 경기도 남양주 별내지구와 다산 신도시, 구리시 갈매지구 등이 개발돼 있다. 노원구청장은 '대통령께 드리는 글'에서 "노원구는 주택의 80%가 아파트이고 우리나라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라 주차난과 교통 체증이 심각한데 또다시 1만가구 아파트 공급은 노원구민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이라고 했다.

서울의 1인당 생활권 도시 숲 면적은 런던의 6분의 1, 뉴욕의 5분의 1밖에 안 된다. 누가 이런 데서 살고 싶겠나. 집값 잡기의 절박함은 이해한다. 그렇더라도 아파트로 빽빽한 서울에서 그나마 보전돼 있는 녹지를 또 아파트로 채우겠다는 건 납득 못 하겠다. 발표에 앞서 국토부 장관이 국방부 장관을 찾아가 협의했다고 한다. 태릉골프장은 용산 미군기지터(243만㎡)의 3분의 1 규모다. 이만한 도시 녹지의 운명이 공론화 과정 없이 이렇게 간단히 결정될 사안인가. 얼마 전 여당 대표가 아파트가 늘어선 한강변 풍경을 거론하며 '천박한 도시'라고 했다는데, 태릉골프장을 아파트로 채우겠다는 것은 천박한 발상이 아닌가.

전문가 중에 용산에 미군이 주둔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어떤 모습이 돼 있겠느냐는 가정을 해보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아파트, 빌딩이 즐비한 난개발지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심리학자 매슬로의 '인간 욕구 5단계론'에 따르면 사람은 생리·안전 등 하위 욕구가 충족된 다음에야 어울림·존경·자아실현 등 상위 욕구를 추구한다. 집단으로서 사회도 마찬가지여서 1960~1980년대 개발 시대에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 목표였다. 우리 도시들에 남아 있는 무질서한 개발의 흔적들은 그 결과물이다. 1차 욕구가 만족된 다음에는 청계천 복원 같은 상위 목표가 등장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지 30년이 넘었고, 청계천과 서울숲이 서울을 업그레이드한 효과가 증명된 지 1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군 골프장으로 운영돼온 덕에 녹지로 유지될 수 있었던 태릉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발상이 등장한 것이다. 시대를 거꾸로 가고 있다.

빈 땅이 있으면 거기에 무언가 집어넣으려는 것은 개발 시대의 사고방식이다. 국방부가 태릉골프장을 양보했다면, 과밀해질 대로 과밀해진 서울에 극도로 부족한 녹지 공원을 보충할 절호의 기회다. 국방부도 시민에게 공원을 선물해주기 위해서였다면 더 흔쾌히 양보했을 것 같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25/202008250506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