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1.02 03:20
2017년 새해가 밝았으나 우리는 아직 어둡고 긴 터널 속에 있다. 대통령 탄핵 사태보다도 심각한 것은 우리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비관(悲觀)과 무기력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올해 자신의 살림살이가 나아질 것이라고 답한 우리 국민은 11%, 나라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 본 국민은 단 4%였다. 66개국 가운데 최하위였고 지난 38년간 역대 최저치였다. 수개월간의 국정 혼란상 때문만은 아니다. 대한민국이 한계에 왔고 지금 이대로는 벽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절감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덫에 걸려 있다. 자기 지역, 자기 집단, 자기 세력의 이익만을 추구하다가 서로 뒤엉킨 채 함께 벼랑으로 밀려가는 것이다. 문제의 해답이 뭔지는 뻔히 알고 있다. 그러나 서로를 믿지 못하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생각 때문에 그 답을 풀지 못하고 있다. 세계 역사에 없는 성공 사례였던 우리가 '실패 국가'의 대열에 합류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이 먹구름처럼 나라를 덮고 있다.
답을 알면서 풀지 못하는 현장이 바로 국회이고 그 정점이 청와대다. 대통령 탄핵 심판 결과에 따라 이르면 4~5월에도 대선이 치러질 수 있다. 불과 몇 달 뒤인데도 지지율 1, 2위를 다투는 후보의 비호감도가 50%를 넘는다. 국민 다수가 흔쾌히 믿고 맡길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또 누군가는 대통령이 돼서 권력을 휘두를 것이고 패한 측은 이를 갈며 '무조건 반대'의 장벽을 세울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가 또 한 바퀴 돌아가는 것뿐이다. 이 정치 체제로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악순환에 빠진 나라를 선순환으로 되돌려 놓을 수 없다.
국내의 거의 모든 전문가들, 해외의 전 기관이 '대한민국 경제는 구조 개혁 없이는 미래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구조 개혁은 인기가 없다. 인기 없는 정책은 정치권에 초당파적 기운이 돌지 않으면 성사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정치는 극단적 당파 싸움일 뿐이다. 할 수 있는 건 포퓰리즘밖에 없다.
오는 20일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동북아를 둘러싼 강대국의 지도자들은 상대에게 근육을 드러내는 이른바 '스트롱맨(strongman)' 스타일의 인물들이다. 새해 세계 정세를 초(超)불확실성의 시대로 부르는 것이 전혀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트럼프는 '자유민주 진영'이라는 가치보다 현실적 이익을 중시하는, 과거와 전혀 다른 유형의 미국 대통령이다. 60여 년을 지켜온 한·미 동맹에 경천동지할 사건이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다. 우리가 당연시했던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시대가 왔다. 안보의 거의 모든 사안을 놓고 여야가 대립하는 지금의 정치 구조로 우리가 이 초불확실성의 시대를 헤쳐갈 수 있는가. 없을 것이다.
이제 미·중(美中) 간 패권 경쟁은 피할 수 없는 길로 접어들었다. 우리에겐 최악의 시나리오다. 안보 동맹과 무역 시장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이 앞에 놓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 정치권은 국가 전략 수립이 아니라 미·중 대리전을 벌이고 있다. 대선에서 앞서 가는 야권의 대선 주자 중에 대중(大衆) 정서에는 반하지만 국가적으로 필요한 외교·안보적 결정을 내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정치 체제에서 그런 결정은 곧바로 자신의 실패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올 한 해 성장률 목표치를 2%대(2.6%)로 잡았다. 외환 위기 이후 18년 만에 2%대로 낮춰 잡은 것이다. 그만큼 성장 동력은 떨어져 있고 경기 침체를 가속할 요인들만 쌓여 있다. 소비나 설비·건설 투자에서 취업자 증가 폭까지 모든 내수(內需) 지표가 작년보다 나빠질 전망이다. 가계부채 시한폭탄은 지금도 초침이 돌아가고 있다. 저신용·저소득 다중 채무자의 빚만 78조원에 달한다. 금리가 올라가면 버틸 수 없다. 부동산 시장 연착륙마저 실패하면 재앙이 온다. 트럼프발(發) 보호무역 파고와 미·중 통상 분쟁 쓰나미가 이중(二重)으로 밀려들 수 있다.
그래도 이 위기를 돌파할 힘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공직 사회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상책이라는 패배주의에 빠져 있다. 서로 손발을 묶는 정치가 지속되면서 관료 사회에 퍼진 무기력 증후군이다.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던 나라가 어느새 '될 일도 안 되는 나라'로 바뀌었다. 희망이 안 보인다는 절망감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병균처럼 스며들어 있다.
정말 우리는 여기까지인가. 여기가 끝인가. 결코 그럴 수 없고 그렇지도 않다.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저력의 국민이다. 수많은 위기를 낭비하지 않고 기회로 만들어 세계 10위권 경제 국가에 오른 나라다. 다만 일시적 장애에 막혀 있을 뿐이다. 단 한 번의 계기로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나라와 사회의 분위기와 기풍이다. 이 역시 우리는 해답을 알고 있다. 많은 국민, 정치인들이 일방적 통치(統治)의 시대, 승자 독식·패자 절망의 시대, 비타협 무한 투쟁 시대를 이제는 끝내자고 한다. 51% 지지의 승자와 49% 지지의 패자가 경쟁하되 함께 가는 국정 동반자의 새 시대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지역·계층·세대·이념·노사·남녀 등 우리의 많은 갈등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은 넘지 않는 사회로 가자는 것이다. 조선일보 신년 여론조사에서 개헌을 바라는 국민이 반대의 두 배에 이르고, 3년 뒤 2020년에 새
이제 새 레일 위로 '안 된다'가 아니라 '된다'는 희망의 열차가 달리게 해야 한다. 모두가 그런 절박한 심정으로 30년 만에 시작된 국회 개헌특위를 바라보고 있다. 이 소중한 대한민국을 '안 되는 나라'에서 다시 '되는 나라'로 바꿔 주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