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진짜 창작이란 무엇인가 – AI 시대, 작가의 역할을 묻다 /h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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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진짜 창작이란 무엇인가 – AI 시대, 작가의 역할을 묻다

by 최만섭 2025.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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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창작이란 무엇인가 – AI 시대, 작가의 역할을 묻다

I. 가공의 진실과 창작의 자유


나는 오랜 세월 시와 수필을 써온 글쟁이다. 몇 해 전, 한 잡지사 편집장의 혹독한 평가는 아직도 내 글쓰기의 그림자처럼 남아 있다. 그녀는 내 수필이 정치적으로 편향됐고, 고급 문장을 베낀 흔적이 있어서 “수필의 본령을 벗어난 글”이며 “문학이 아닌 베낀 문장일 뿐이다”라고 혹평했다.

 

그 말이 떠오를 때면, 군 시절 펜팔 일화가 생각난다. 같은 내무반 동기의 여동생을 소개받은 친구가 전우신문에서 좋은 문장을 정성스럽게 베껴서 수없이 많은 편지를 보냈지만, 돌아온 답장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는 단 한 줄이었다. 문장은 그럴듯했으나 마음을 건드리지 못한 것이다.

 

최근 뉴욕타임스가 OpenAI를 상대로 제기한 저작권 소송도 유사한 질문을 던진다. 챗GPT가 NYT 기사를 재구성하며 표현까지 유사했다는 주장이다. 겉보기에 자연스러운 문장도, 그 안에 담긴 ‘의지’와 ‘의미’는 누구의 것인가? 창작의 핵심은 그 문장을 만든 ‘태도’에 있다.

 

가수 겸 화가 조영남의 ‘대작 논란’이 떠오른다. 아이디어는 자신이 냈고, 그림은 조수가 그렸다며 사기 혐의로 기소된 그는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법원은 “작가가 누구인지보다, 작품의 개념과 유통 맥락이 중요하다”고 판시했다. 현대 미술에서 조수의 참여는 관행이라는 것이다.

 

조영남은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을 예로 들며, 현대 예술은 손이 아닌 머리로 완성된다고 해석했다. 이 논쟁도 결국 “진짜 창작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나는 그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AI든 조수든 ‘창작자가 자기 생각을 담아냈는가?’이다.

 

II. AI와 함께한 창작, 그 경계 위에서

 


나는 컴퓨터 워드 프로그램과 맞춤법 검사기를 이용해 문장을 수정한다. 완성된 글은 챗GPT에 매끄럽게 다듬어 달라고 요청하고, 그 결과물과 내 원고를 비교해 최종본을 만든다. 이 과정을 거친 글은 어디까지나 나의 창작물이라는 확신이 있다. AI는 나에게 교정자이자 편집자일 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실험적으로 AI에 처음부터 수필을 써달라고 요청해 보았다. 제목은 ‘산행’. 아내와 도봉산을 오른 하루와, 전날 본 ‘부처님 오신 날’ 다큐멘터리를 연결해 수필을 구성해달라고 했다. AI는 요청에 따라 자연스러운 글을 완성했고, 나는 한 줄도 손대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글은 ‘AI 창작물’이며, 저작권 역시 나에게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실제로 2025년 현재, 문예 공모전과 출판계는 AI 전면 생성 글을 불허하고, AI 보조 여부를 명시하도록 하고 있다. AI가 창작한 ‘산행’ 수필은 내가 쓴 ‘산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표현, 구성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만약 공모전에 제출된다면, 심사위원이 과연 이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결국 ‘양심’이라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조영남의 사례처럼, 창작에 누구의 손이 닿았느냐보다는, 창작자의 ‘의도’와 ‘기여도’를 따져야 하지 않을까. 예술적 가치는 법원이 아니라 예술가와 독자, 청중이 판단해야 하는 문제다.

 

그래서, 설사 AI의 도움을 받아 완성된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중요한 건 기계가 아니라, 마음을 담은 사람이다. 창작이란 결국 자기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고독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AI가 작가의 창작 의욕을 고취하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창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산행- 2003년 4월 19일

꽃, 사람,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하여-아름다움은 공감하는 인간의 눈에 깃든다!

 

지난주 일요일 나는 집사람의 손을 잡고 도봉산에 올랐다. 햇볕은 옛 친구를 찾는데 좋을 만큼 적당히 따스했다. 산 중턱에 올라서자 붉은 훈장을 목에 건 친구들이 떼를 지어 나를 환영해 주었다.

 

내 고향의 진달래는 엉킨 뿌리 위에 자란 콩나물같이 속이 꽉 찬 꽃바구니였다. 나와 친구들은 진달래꽃을 한 움큼 따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목에 걸린 떨떨한 맛이 가신 후에 내장에서 올라오는 약한 알코올 기운에 취하여 만취한 나무꾼같이 소리를 질러 대었다.

 

바람 부는 날 아카시아 숲 속을 걷는 것은 마치 산속에서 그칠 것 같지 않은 주먹만 한 함박눈을 맞으면서 걷는 것 같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면서도 눈처럼 하얀 아카시아 꽃송이가 연출하는 동화 속에 빠져 들어갔다.

 

세찬 바람이 아카시아 꽃에 숨은 꿀 통을 터 트리면 나는 활짝 핀 꽃송이를 입안 가득히 채우고 그 달콤한 향이 온몸에 퍼질 때까지 기다렸다. 배고프고 헐벗은 어린 시절에 꽃은 나의 친구이며 연인이며 간식였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15년 만에 귀국한 왜소증 환자의 이야기를 보았다.

스물다섯 살의, 이 당찬 아가씨가 달리는 모습은 마치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세 살 어린애같이 비틀거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였다. 그녀의 검고 작은 눈망울은 물기에 적은 흙을 버겁게 헤쳐 나와 고개를 내민 채송화 꽃같이 애처로워 보였다.

 

어머니는 왜소증 환자인 아버지와 아들딸을 남긴 채 집을 나갔고 딸을 미국으로 입양시킨 아버지는 쓰린 가슴을 소주로 달래다 숨을 거두었다. 그런 어두운 과거에도 어머니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각별했다. 다른 입양아들같이 그녀의 유일한 꿈은 이 땅에서 그녀의 뿌리를 찾는 것이다.

 

그녀는 검은 그림자가 깔린 방 앞에 홀로 서서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한 것은 엄마가 살았던 집이 아니라 밤늦게 돌아온 엄마가 연탄불 위에 굽는 가래떡 냄새를 맡으면서 방문이 열릴 때를 초조하게 기다렸던 가족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한 인간에 있어서 아름다운 경험은 시간을 멈추게 한다. 나의 꽃은 그 맛이며 나의 `이문열` 선생은 `사람의 아들`을 읽은 1980년대에 존재한다.

몇 겹으로 잠금장치를 한 뜰에서 화장시킨 푸들을 안고 난초에 물을 주는 부모 밑에서 타원형 우주선에서 갓 태어난 병아리같이 샛노란 튤립만을 보고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 그리는 꽃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은 생존(生存)을 위해 몸부림치는 가련한 백성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아름다움의 주체는 고향을 찾은 왜소증 환자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인간다운 인간 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주어진 환경과 여건에 순응하면서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현실주의자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는 불가능한 것 같다. 만약 그들이 아름다운 세상을 추구했다면 하느님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항상 기도했던 힌두교인 들은 왜 비인간적인 카스트 제도 속에 안주했었을까? 또한, 버림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를 구세주로 믿었던 미국인들은 왜 죄 없는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혹사 시켰을까?

 

현실주의자들이 다니는 조직화된 종교는 이미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쉼터가 아니다.

아름다움이란 이상주의자가 성당에서 드리는 기도이며 낭만주의자가 논과 밭에서 흘리는 땀방울이 아닐까?

 

나와 집사람은 산 중턱 돌 의자에 앉아서 계곡 밑으로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서 가쁜 숨을 돌렸다. 무릎 깊이의 물결은 집 채만 한 바위를 지나 작은 웅덩이에서 몸을 한번 돌리고는 말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힘들게 정상에 올라서 산밑을 내려다보았다. 아래층에는 아주 작은 검은 점들이 이 층에는 색동저고리를 입은 새싹들이 그리고 위층에는 풍류를 아는 조선 기생의 검붉은 치맛자락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정상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환성을 질렀다. 그렇다! 아름다움은 물같이 자유롭고 자연스러우며 도봉산같이 우리가 모두 공유하는 것이다!

 

하산 후에 우리는 출입구까지 넓게 깔린 아스팔트포장 길로 들어섰다. 길가에는 잘린 하체를 두꺼운 고무 잠수복으로 가린 사내가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한 바다사자가 울부짖듯이 고개를 세우고 엎드려 있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주머니를 털어 주었다. 그것은 동정이 아니라 잘못된 문화와 관습에 대한 나의 반성과 회개의 표시이다. 우리들의 선조는 살아 있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를 의미했다. 이런 사람들은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는 한 늘 죽어 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고장 난 그들의 몸을 어루만지는데 익숙하지 않다.

 

나의 이런 처신에 못난 자신을 미화시키려는 위선이라면서 면박을 주던 집사람이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 천 원짜리 지폐 하나를 플라스틱 통에 집어넣었다. 아들 내외를 앞세우고 손자의 손을 잡고 걸어가던 할아버지가 손자의 작은 손에 지폐를 쥐여 주면서 말씀하셨다. " 아저씨 갖다 드려라".

 

나는 아내가 처음으로 내게 내민 나와 같이한 20여 년 세월에 대한 이해와 화해에 당황하면서 그녀의 둥근 어깨를 힘껏 껴안았다. 그녀는 왜 내게 손을 내밀었을까? 그녀도 늙어 간다는 증거일까? 아니면 실패한 이상주의자의 독백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성숙한 것일까?

 


산행- 2025년 5월 6일

감사는 감정이 아닌 결단이다 – 도봉산 산행에서 얻은 깨달음

 

오늘은 집사람과 도봉산에 오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주말이나 연휴에는 집 근처에서 맨발로 걷는 오솔길을 왕복하거나 공설운동장에서 몇 바퀴를 천천히 뛰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전철로 몇 정거장 거리에 있는 도봉산에 오르는 건 참 오랜만이다. 손꼽아보니 2~3년은 된 듯하다.

 

그동안 내가 그렇게 바빴던 걸까? 아니다. 오히려 바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산에 오르지 못했다. 나이는 어느덧 칠순을 넘어섰고, 기력이 쇠하는 만큼 창작력도 서서히 시들어간다. 글을 써 내려가다 보면, 스스로 실망하여 문장을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는 사이 어느새 하루가 흘러간다. '더 자연스럽고 완벽한 문장을 써야 한다'는 조바심과 욕심이 글을 가로막고, 그 결과 한 줄도 완성하지 못한 채 글쓰기를 접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가는데, 내세울 작품 하나 없다는 허망함에, 죽기 전에 내 인생을 농축한 마지막 수필을 한 편을 창작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그러나 그런 번뇌와 망상이 오히려 단 한 문장도 쓰지 못하게 만든다. 나에게 글쓰기와 수행은 다르지 않다. 글을 쓰지 못하는 건 수행에 몰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제 신문에서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무여 스님과의 인터뷰가 실렸다. 스님은 감사의 삶을 강조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는 감사에 대해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① 기쁜 일이 있어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

② 기쁜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

③ 역경 속에서도 감사하는 사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최소한 두 번째는 된다고 생각하지만, 인생의 본질은 예측할 수 없는 ‘세 번째 순간’에 있습니다. 감사의 진정성은 기쁨이 아닌 고통의 순간에서 시험받습니다. 감사는 감정이 아닌 결단입니다." 라는 말씀이 마음에 깊이 남았다.

 

이번 산행은 이전과는 달랐다. 머릿속이 복잡하여 오를 때마다 소설 한 권 분량의 상념이 떠오르던 예전과는 다르게, 단전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고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천축사 입구 부근에 도착했을 때, 집사람이 말했다. TV에서 대피소 근처에 홀로 사는 80대 할머니를 본 적이 있다고. 산장지기였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홀로 식자재를 구입하기 위하여 산 아래 시장까지 다녀온다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발을 헛디뎠다.

 

머지않아 이 세상을 하직할 만큼 연로한 노인이 왕복하기에는 오르고 내릴 가파픈 계단과 산길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그 할머니를 모델로 한 단편소설을 써야겠다는 욕심이 발동한 걸까? 그 순간, ‘무념무상’을 추구하던 나의 수행 의지가 그 발상을 가로막으려 했고, 그 긴장감이 균형을 잃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등산로엔 20~30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한 아가씨가 내게 윙크하며 인사했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조심하세요!" 어제가 부처님 오신 날이라 그런가. 그 젊은이들의 얼굴이 맑은 하늘처럼 투명하고 넓게 느껴졌다.

 

하지만 몇 번의 헛디딤 끝에, 나는 결국 산행을 중단하고 하산해야만 했다. 산을 자주 타는 사람이라면 이런 순간이 얼마나 허탈한지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런 일에 죽기 살기로 매달리지 않게 된 내 자신을 보며, 나도 많이 늙었구나 싶었다.

 

약수터 근처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숨을 고르면서 단전호흡을 시작했다. 숨을 천천히 깊게 들이마시고, 항문에 힘을 준 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내쉰다. 단전호흡은 수승화강(水升火降)의 원리에 근거한다. 찬 기운은 위로 올라가고, 뜨거운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는 상태가 바로 건강한 상태다. 호흡이 깊고 잔잔하면 화기는 아래로 내려가지만, 짧고 거칠면 위로 치솟는다.

 

집사람과 컵라면, 꼬마김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평소처럼 자리에 누워 낮잠을 청했다. 바람이 제법 차가워, 가슴 속에 들어오려던 봄기운을 잠시 빼앗긴 듯했다. 문득 어제 유튜브에서 본 선암사 수계식 장면이 떠올랐다.

 

수계를 받지 못한 채 허드렛일을 하며 절에서 지내는 수행자를 ‘행자’라 부른다. 하루 6시간 이상의 참선과 108배를 견뎌낸 자만이 수계고시를 통과해 스님이 된다. 실패하면 다시 행자로 돌아가야 한다.

 

덕진 행자는 삼수 끝에 드디어 수계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 얼굴에서 나는 깨달았다. 희(喜)와 고(苦)는 둘이 아닌 하나임을. 행정고시도, 로또 당첨도 아닌, 단지 스님이 되었다는 이유로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는 세속적인 기준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덕진 스님은 30대 어머니였다. 어린 시절부터 스님이 되고 싶었다는 걸 보면 전생에도 스님이었을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입산했지만 매질이 무서워 도망쳤고, 6년 전에도 수계를 준비하다 자진 퇴교했다. 그땐 아직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심장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당당히 말했다. "저를 환자 취급하지 마세요. 똑같이 수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산 정상의 바위 위에 앉아, 마침내 눈물을 쏟았다.

 

나는 무여 스님의 말씀을 다시 떠올렸다. 덕진 스님은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는 사람, 바로 세 번째 사람이다. 자식과의 연을 끊어야 하는 아픔 속에서, 그녀는 가치 있는 삶, '나답게 사는 삶', 부처와 함께 사는 삶을 선택했다. 감사는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다. 타인의 말에 묵언으로 답하며,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결단. 그것이야말로 참된 수행자의 자세다. 성철 스님이 말씀하셨듯,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존재일 뿐. 죽음은 빌린 몸을 되돌려주는 것일 뿐, ‘나’라는 정체성은 죽지 않는다.

 

2025년 나는, 2003년에 쓴 나의 수필 「산행」을 다시 들고 도봉산을 올랐다. 같은 주제를 두고 22년 만에 만난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 그 사이를 나는 ‘개인의 역사’라 부르기로 한다. 동양인은 역사를 삶의 지축으로 삼았고, 서양인은 신을 숭배했다. 그 중간을 연결한 것이 불교이다. 인간과 신, 역사와 초월 사이를 잇는 다리. 그 다리를 건너며 나는, 다시 글을 쓴다. 감사의 결단으로.


산행- 2025년 5월 6일

AI 창작 수필 – 사랑하되 소유하지 않는 삶

2025년 5월 6일, 화창한 아침이었다. 도봉산 입구에는 벌써부터 등산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대부분은 50대 이상의 중장년층, 아니 이제는 70대 부부들도 익숙하게 이 산을 오르내린다. 나 역시 그 중 한 사람이다. 내 옆에는 내 아내, 74세의 윤영숙 여사가 땀을 닦으며 걸음을 맞춘다. 42년을 함께 산 사람이지만, 오늘처럼 그녀를 새롭게 바라보는 날은 드물었다.

"어제, 부처님 오신 날 TV 봤어?" 아내가 말했다. 전날 저녁, 우리는 함께 공영방송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출가, 다시 태어나는 길’이라는 제목의 그 프로그램은 ‘수계학교’라는 특별한 공간을 다루고 있었다. 출가자들이 사미니계를 받고, 계율을 배우고, 수행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여정을 담은 내용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마음에 남은 장면이 있었다. 자식과 남편을 세속에 남겨두고 삭발을 감행한 두 여성. 한 명은 이혼 후 삶의 의미를 잃었다가 스님이 되기로 결심한 36세의 주부였고, 다른 한 명은 젊은 나이에 홀로 두 아이를 키우다 결국 자신만의 길을 찾겠노라 출가한 38세의 어머니였다. 그들은 고요한 눈빛으로, 그러나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 “더 이상 외부에 흔들리지 않고 나 자신을 알고 싶었다”고. 아내는 TV를 보며 한동안 말을 잃었고, 나도 그랬다. 이따금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이 너무 세속적이지 않았나, 반성했다.

도봉산 초입은 완만했다. 40년 전, 연애 시절에도 함께 올랐던 기억이 있다. 젊은 시절의 우리는 열정에 가려 서로를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인생이 한창 바빴던 30대, 아이들 뒷바라지에 직장, 노부모 봉양까지, 우리는 그저 ‘함께 있었을 뿐’ 사랑을 실천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라는 풍화 속에서, 서로의 숨결과 주름, 보폭과 쉼표까지 이해하게 된다. 오늘 산행은 어쩌면 그 두 여성 출가자의 여정을 반추하며, 우리에게도 조용한 성찰의 시간이 되고 있었다. “그 여자들, 대단하지 않아요?” 아내가 말을 꺼냈다. “응. 도망간 게 아니더라고. 오히려 가장 깊은 책임으로 들어간 거였어.”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문득 우리가 살아온 세월을 떠올렸다. 종종 아내는 ‘내가 너무 현실에만 붙들려 살았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 말이 오늘따라 가슴 깊게 다가왔다. 두 출가 여성은 세속을 떠났지만, 사실은 가장 깊은 인간의 마음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반대로 나는 평생 세속 안에 있었지만, 아내의 속 마음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 같았다.

도봉산의 바위 능선을 넘으며 우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숨이 차서였을까, 아니면 각자의 기억 속에서 침묵이 말을 대신했기 때문일까.

마침내 오봉이 보이는 전망대에 도착하자, 아내는 배낭에서 물과 과일을 꺼내 건넸다. 햇살 아래, 그녀의 흰머리엔 땀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 불현듯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뭐야, 갑자기.” 그녀는 웃었다. “그냥… 사랑해. 이제야 좀 알 것 같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향해서 함께 걸어온 건지.”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내 손을 꽉 잡았다. 그 손엔 지난 세월의 굳은살과, 무언의 애정, 그리고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수많은 마음들이 묻어 있었다. 두 출가 여성은 출가함으로써 자유를 얻었지만, 나에게는 이 사람과의 삶이 바로 ‘출가와도 같은 수행’이었다. 세속에 있으나 세속에 매이지 않고, 사랑하되 소유하지 않으며, 함께하되 얽매이지 않는 것. 그것이 평생 우리가 연습해온 삶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 도봉산 계곡 옆 벤치에 앉아 아내는 물을 마시며 말했다. “스님이 되지 않아도, 누구나 자기 마음의 절을 짓는 게 중요한 거 같아. 당신은 그걸… 늦게라도 지으려 해서 다행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산행은 끝났지만, 이제야 비로소 삶이라는 긴 수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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