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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로 성공한 늦깎이 한국, 이제 ‘왜’로 방향 틀 때 [강천석 칼럼]

최만섭 2022. 6. 4. 09:12

‘어떻게’로 성공한 늦깎이 한국, 이제 ‘왜’로 방향 틀 때 [강천석 칼럼]

尹 정부, 급한 불 너머 큰 그림도 보고 革新 길 뚫으라
우등생이 이끌던 한국, 邊方에서 기른 창조적 發想法 제시해야

입력 2022.06.04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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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대통령 선거에서 6월 1일 지방선거까지 장장 84일간의 선거 행군(行軍)이 끝났다. 작년 10월 10일 민주당, 11월 5일 국민의 힘이 각각 대통령 후보를 선출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8개월이 넘고, 후보 경쟁에 열이 붙기 시작한 작년 초부터 따지면 1년 반을 선거 속에서 살았다. 2024년 4월 10일 총선까지는 선거가 없다. 윤석열 정부에 국가 경영 능력을 보여줄 무대가 열렸다. 한국 정당의 몰락 주기(週期)는 대선 패배·지방선거 패배·총선 패배, 그리고 다시 대선 패배로 한 바퀴 돌아야 완결된다. 민주당은 앞으로 패배의 바퀴를 더 굴려야 할지 모른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월 20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생산시설을 시찰하던 중 양손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대통령들은 재임 기간 동안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고 한다. 5년을 그렇게 바쁘게 지내다 어느 날 문득 멈춰 되돌아보면 출발했던 자리에서 제자리걸음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급한 일만 서두르고 중대한 일을 뒤로 밀쳐뒀기 때문이다. 나라가 밟아온 길과 걸어갈 길을 함께 봐야 역사적 전망(展望)이 열린다.

한국·독일·일본 역사에는 공통점이 있다. 세 나라 모두 한때 역사의 지각생이었다. 근대 자본주의 세계를 만든 산업혁명으로부터 50년·100년·200년 뒤처진 나라였다. 영국이 불을 댕긴 산업혁명의 기점(起點)을 1760년대 전후로 친다. 그 시절 독일은 2000여 개의 영주(領主)가 다스리는 땅과 자유 도시가 뒤엉킨 모자이크 지역에 불과했다. 1807년 침략자 나폴레옹이 낙후(落後)된 이곳에 근대적 도로를 몇 개 뚫었다.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다. 그 무렵 고(高)봉급자 100명 전부가 외국인 기술 고문이었다. 한국은 1960년대에 세계경제에 합류(合流)했다. 한국 관리와 기업인들이 선진 문물을 배운다며 필리핀과 파키스탄으로 견학 가던 때다.

세 지각생의 현재 경제 성적표는 일본 2위, 독일 3위, 한국 8위다. 1949년 출범 이래 공산당 일당(一黨)독재 체제인 중국을 포함하면 순위가 한 순번씩 밀린다. 영국은 지각생 독일과 일본의 경제 선생님이었다. 독일은 영국에서 들여온 제철(製鐵) 기술을 혁신해 강철 시대의 선두 주자로 나섰고, 일본은 영국산(産) 방직 기계로 만든 제품으로 영국의 시장을 빼앗았다. 한국은 일본과 독일을 때론 교과서, 때론 참고서 삼아 늦공부를 시작했다. 조금 부풀리면 그런 영국과 한국 간 지금 경제 격차는 지척(咫尺)이다.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며 공부해야 우등생이 된다고 한다. 독일은 유황이 다량 함유된 철광석에서 ‘어떻게’ 유황을 제거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어 영국을 넘어섰고, 일본은 칩을 ‘어떻게’ 쌓아야 성능을 높일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해결해 반도체 기술의 원산지 미국을 넘었다. 한국 역시 외국산 원천 기술에 ‘어떻게’라는 질문을 입혀 반도체·자동차·전기배터리 산업을 주력(主力)으로 키웠다.

우등생을 만드는 ‘어떻게’ 공부법의 한계는 원천 기술을 낳지 못한다는 것이다. 원천 기술은 ‘왜’라는 물음에서 탄생한다. ‘어떻게’는 던져진 문제를 푸는 능력을, ‘왜’는 숨겨진 문제를 찾아내는 능력을 키운다. 그러나 ‘왜’라고 묻는 공부법은 성공률이 낮다. 창조적 천재로 다시 태어나는 숫자는 적고 다수(多數)는 이단아(異端兒) 또는 낙오자로 불운한 삶을 산다.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라는 연구에 따르면 서울대는 ‘어떻게’ 공부법 공장이다. 그렇게 키운 우등생들이 한국을 이만큼 성공한 나라로 만들었다. 여기가 한계다.

‘어떻게’와 ‘왜’라는 질문 차이는 개인의 선택이기에 앞서 사회적 관성(慣性)이다. 그래서 ‘어떻게’에서 ‘왜’로 옮겨가기 어렵다. 일본은 1990년대부터 ‘어떻게’에서 ‘왜’로 탈바꿈하려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주저앉았다. 지금 일본이 부딪힌 절벽 중 하나다. 독일은 근대화 초기부터 ‘왜’와 ‘어떻게’를 병존(竝存) 배합(配合)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수학·물리학·화학 등 자연과학·공학(工學)·인문사회과학의 하늘 박힌 수많은 독일 천재들을 낳고 키운 어머니가 ‘왜’다.

한국은 변방(邊方)에서 세계 중심으로 진입(進入)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변방은 거칠고 무모하다. 그러나 세계 질서를 바꾼 정치 세력도 거친 유목 지대에서 몸을 일으켰고, 과학의 대전환 역시 주류 이론의 울타리 밖에서 무모하게 도전한 소수(少數) 이론에서 싹텄다. 상상력도 마찬가지다. 칸에서 한국 영화는 변방에서 오래 키운 나이테의 힘을 보여줬다. 변방의 서러움을 도약(跳躍)의 디딤돌로 바꿔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