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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전사하고, 폭격 두려워도… 귀국열차는 새벽까지 북적였다

최만섭 2022. 5. 15. 06:40

남편 전사하고, 폭격 두려워도… 귀국열차는 새벽까지 북적였다

본지 정철환 특파원 우크라 르비우 르포

입력 2022.05.14 03:00
 
 
 
 
 
새벽 1시 '조국'에 도착 - 12일 밤(현지 시각) 폴란드에서 출발한 열차가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르비우 기차역 승강장에 도착하자 피란 갔던 우크라이나인들이 열차에서 내리고 있다. 러시아군의 공격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귀향길을 택한 우크라이나인들은“조국만 한 곳은 없다”고 말했다. /르비우=정철환 특파원

“봐, 이제 우크라이나야. 우크라이나에 돌아왔어!”

12일(현지 시각) 밤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 서부 국경 지대로 막 진입한 르비우행 야간 열차 ‘IC 0036′호 객실. 느릿느릿 움직이던 차창 너머, 반쯤 무너진 듯한 회색 콘크리트 건물에 큼지막하게 쓴 ‘우크라이나(Україна)’라는 글자가 보였다. 우크라이나 출신 승객 일리나(41)씨가 옆자리 친구를 잡아끌어 창밖을 가리켰다. 지난 2월 28일 집을 떠난 지 70여 일 만의 귀향. “(전쟁이) 무섭지는 않으냐”고 번역기를 이용해 묻자 일리나는 “(폭격이) 왜 두렵지 않겠나. 피란 생활도 힘들다. 전쟁 통이지만 내 집만 한 곳이 없다”고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이날 오후 6시 폴란드 남동부 국경 도시 프세미실 중앙역은 우크라이나로 귀향하려는 피란민으로 북적였다. 러시아 공세를 피해 탈출하려는 이들로 북새통이던 지난 2월 말과는 정반대였다. 국경을 지나는 국제 열차가 있는 4번 플랫폼에선 출국 심사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100m 넘게 줄을 서 있었다. 승객 90% 이상은 여성과 청소년, 어린이였다. 모두 대형 짐 가방을 서넛씩 갖고 있었다. 이바나(39)씨는 “다들 피란살이 살림을 다 챙겨왔으니 짐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IC 0036호 열차는 폴란드 프세미실을 출발, 우크라이나 서부 중심 도시인 르비우를 거쳐 남쪽 끝 항구 도시 오데사까지 900여㎞를 16시간 동안 운행하는 완행열차다. 구(舊) 소련 시절 제작한 듯한 낡은 외관에, 속도는 기껏해야 시속 80㎞다. 르비우까지 편도 요금은 45즈워티(약 1만3000원). 우크라이나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저렴한 교통 수단으로 서민들의 ‘귀향 열차’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열차는 객차마다 10여 칸이 있고, 칸마다 아래위 둘씩 침대가 총 4개 있는 구조다. 하지만 위쪽 침대는 짐으로 가득 차 아래 두 침대에 4명이 붙어 앉아 밤을 지새워야 했다. 옆자리 승객 카트리야(35)씨는 폴란드 제슈프에서 아들(14)과 함께 지내다 르비우 근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남편은 군에 입대했다. 폭격은 두렵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기쁨이 더 크다”고 했다. ‘폴란드나 독일, 프랑스에 계속 머물 생각은 안 해 봤느냐’고 묻자 그는 “나처럼 농사만 짓다 (도시에서) 허드렛일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외국이 더 고될 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해가 저물자 기차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우크라이나 영토를 달렸다. 차창에는 모두 투명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차장은 “(폭격으로) 창이 깨졌을 때 파편이 튀는 걸 막으려는 것”이라고 했다. 승객들 모두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전쟁과 죽음의 그림자는 이 열차에도 드리워져 있었다. 자정쯤 조용하던 옆 칸에서 갑자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한 승객이 “남편이 어제 동부 돈바스에서 전사한 것 같다”고 귀띔했다.

열차는 우크라이나 국경 수비대 검문을 두 번이나 받았다. 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일일이 여권을 검사했다. 특히 남자 승객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한 승객은 “친러 분자를 색출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철도는 최근 러시아군의 1순위 공격 표적이다. 철도를 통해 각종 물자와 군수품이 우크라이나군에 전달되고, 외국 정상들까지 키이우로 실어 나르고 있기 때문이다. 피란민들이 탄 열차 옆으로도 적재물을 알 수 없게 덮개를 씌운 화물 열차가 여럿 지나갔다.

다행히 이날 폭격이나 공격 징후는 없었다. 열차는 13일 오전 1시 넘어 르비우역에 도착했다. 아이들 손을 잡고 무거운 짐과 함께 기차에서 내린 어머니들 일부는 플랫폼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르비우역과 그 주변은 조명을 끄거나 줄여 어둡고 황량했다. 인구 72만명의 우크라이나 서부 대표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자원봉사자 요세프씨는 “폭격에 대비한 등화관제 때문”이라며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 바로 가까운 건물로 들어가 대피소를 찾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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