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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戰 불똥, 스리랑카·파키스탄·아르헨 부도 위기

최만섭 2022. 4. 26. 05:12

우크라戰 불똥, 스리랑카·파키스탄·아르헨 부도 위기

전쟁發 물가폭등, 무너지는 개도국

입력 2022.04.26 03:00
 
 
 
 
 
24일(현지 시각) 스리랑카 최대 도시 콜롬보에서 대학생 등 수천 명이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하는 마힌다 라자팍사 총리는 사임하라”며 거리 시위를 벌이고 있다. 스리랑카는 주요 수입원인 관광 사업이 코로나 사태로 직격탄을 맞고, 중국 일대일로 사업에 참여해 거액을 빌렸다가 실적 부진으로 빚더미에 오르며 1948년 독립 이후 최악의 경제난을 겪고 있다. /EPA 연합뉴스

심장 질환이 있는 신생아를 수술하는 동안 정전이 발생했다. 휴대전화 두 대 불빛으로 겨우 수술을 마칠 수 있었다.”

스리랑카의 한 의사는 최근 미국 CNN과 인터뷰에서 의약품 부족과 전력난으로 나라 전체의 의료 체계가 붕괴 직전이라고 호소했다. 사상 최악의 경제난을 겪고 있는 스리랑카는 외환 보유고가 바닥나 연료·종이·식료품 등 모든 물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시민들은 휘발유를 사기 위해 주유소 앞에서 몇 시간씩 줄을 서고 당국은 하루 최대 13시간씩 강제 단전을 시행하고 있다. 지난 12일 스리랑카는 510억 달러(약 63조원)에 달하는 대외 부채 상환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고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지난달 말 기준 스리랑카의 외화 보유고는 19억 달러(약 2조4000억원)에 불과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여파로 줄도산 위기 맞은 개발도상국들

코로나 팬데믹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대란에 이어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식량·에너지 가격이 폭등하면서 개발도상국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한꺼번에 몰려든 각종 악재가 특히 자생력이 약한 개도국·후진국에 집중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7일(현지 시각) 전쟁발(發) 인플레이션에다 금리 인상까지 겹치면서 10여 년간 저금리로 부채를 늘려온 개도국들이 외채 상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 스리랑카를 시작으로 파키스탄·레바논·이집트·튀니지·아르헨티나 등 외채 비중이 높은 국가들이 줄줄이 디폴트(채무상환 불이행)를 선언할 수 있다는 경고까지 나왔다. IMF는 전 세계 저소득 국가의 60%가 채무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크거나 이미 위험한 상태에 빠졌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부채 규모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15일(현지 시각)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의 한 주유소에서 시민들이 기름을 사기 위해 줄 서 있다. /연합뉴스

밀 수입의 80%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의존하는 레바논·이집트에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밀 수입이 끊기며 ‘빵 대란’이 일어났다. 지난 2019년부터 경제난으로 자국 화폐 가치가 90% 이상 폭락한 레바논은 전쟁 이후 빵 가격이 70% 폭등했다. 이집트는 코로나 유행 이후 주요 산업인 관광업이 침체한 데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곡물 가격 상승과 해외 자본 유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튀니지에서도 설탕·밀가루 등 식료품이 바닥나고 공무원 임금 지급까지 지연됐다.

 

살인적 물가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면서 정치적 혼란도 커지고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자 이달 초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과 그의 형인 마힌다 총리를 제외한 내각 장관 26명 전원이 사퇴했다. 그러나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면서 지난 19일 람부카나 지역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포해 1명이 숨지고 13명이 다쳤다. 파키스탄에서는 물가 폭등과 부채 위기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지난 10일 임란 칸 총리의 불신임안이 가결됐다.

12일(현지 시각)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빵을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로이터

남미 페루에서도 최근 유가·비료 가격이 급등하자 트럭 기사와 농민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가 페루 전역의 주요 고속도로를 봉쇄하면서 관광 명소 마추픽추로 가는 열차 운행이 중단되기도 했다. 이달 초 페루 정부는 지난 1992년 이후 처음으로 주요 도시에 통금령을 내렸다가 거센 반발로 하루 만에 철회했다. 아르헨티나는 연간 물가 상승률이 55.1%를 넘었고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6.7%로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지난 14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선 수천 명이 대통령 집무실 앞으로 몰려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페루 수도 리마 도심에서 7일(현지시간) 식료품 및 연료 가격 급등에 항의해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 정부 규탄 시위에 나선 시민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금리 인상 기조로 부채 부담이 더욱 커진 신흥국들은 앞다퉈 IMF에 손을 내밀고 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IMF는 24일 스리랑카와 구제금융 지원 관련 첫 협상을 마쳤다. 세계은행(WB)에서도 의약품 구매·학교 급식 지원 등에 쓰일 1000만 달러(약 120억원) 상당의 긴급 구호 패키지를 마련하고 있다. 이집트도 IMF에 추가 지원을 받기 위해 자국 통화를 14% 평가절하했다.

IMF와 세계은행은 18~24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춘계회의에서 개도국 디폴트 위기를 주요 의제로 다뤘다. WB는 스리랑카뿐 아니라 앞으로 1년간 10여 국이 부채 상환에 실패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데이비드 맬패스 WB 총재는 지난 21일 BBC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수억명이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최빈국의 부채 부담을 줄여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