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잃어버린 30년처럼 한국도 장기침체 가능성… 성장의 돌파구 찾으려면 창의적 인재 키워내야
[송의달이 만난 사람]
‘위기의 한국경제에 새 전략’ 내놓은 김세직 서울대 교수
한국 경제는 요즘 내우외환(內憂外患) 상태다. 물가와 금리, 환율이 오르는 ‘3고(高) 현상’에다 코로나19 및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미국발(發) 금리 인상, 중국 성장률 둔화 같은 악재 투성이다. 한국 경제가 ‘퍼펙트 스톰’(전대미문의 복합위기)이나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상승)에 직면할 것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김세직(62)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달 14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달 출범하는 새 정부가 장기(長期)성장률 0%대를 여는 첫 정부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장기성장률은 해당 연도 앞뒤로 5년씩 10년치 연간성장률을 산술평균한 것으로 단기 요인에 영향받지 않는 한 나라의 ‘진짜 경제실력’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그는 “김영삼 정부 때 6%대이던 장기성장률은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까지 5→4→3%대로 5년 마다 1%포인트씩 규칙적으로 내려앉았고, 박근혜와 문재인 정부 때는 2%, 1%대로 진입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日·伊 보다 가파른 직선형 추락
- ‘5년 1%포인트 하락 법칙’이 새 정부에도 반드시 적용될까?
“이 법칙은 보수·진보 정부와 무관하게 지난 30년간 정치를 이기며 강력하게 작동해왔다. 최근 20년 평균 0.7%의 한국은행 실질 기준금리와 GDP 대비 30%대의 높은 투자율도 이를 못 막았다. 혁명적 변화가 없다면, 새 정부는 0%대의 ‘제로(zero) 성장’을 각오해야 한다.”
- 다른 많은 나라의 장기성장률도 하락하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6% 넘는 고도성장을 하다가 50년 이상 성장률이 추락한 나라는 6개이다. 이 중 독일을 제외한 일본·이탈리아·포르투갈·스페인·그리스의 장기성장률은 0%대 또는 마이너스가 됐다. 한국은 이들과 달리 거의 유일하게 미끄럼틀 타듯 성장률이 직선형으로 내려갔다.”
- ‘제로성장’ 시대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
“정부 개입이 없다면 연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가 되는 역(逆)성장이 2년에 한 번 꼴로 일어날 수 있다. 연간성장률이 마이너스 1% 아래로 떨어지는 실물 위기는 20% 정도 확률로, 연간성장률 마이너스 10% 이하가 되는 초대형 위기는 5% 확률로 발발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예를 들어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에 잘 대처하지 못한 상황에서 금융위기 등으로 –10%의 단기 충격을 받는다면, 연간성장률이 마이너스 10%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 실제 국민 생활은?
“급여가 올라가는 좋은 일자리가 대거 사라져 근로자 2700만명 중 절반 이상의 실질소득이 매년 감소한다. 1960년대 초부터 30년간 우리나라 GDP가 연평균 8~9%씩 성장해 근로자 소득이 8년마다 배로 늘었던 것과 정반대이다.”
김 교수는 “문재인 정부 들어 2020년 –0.9% 성장에서 보듯 우리나라의 장기성장률 추락은 이미 현실이 됐다”며 “정말 우려되는 것은 ‘저성장 고착화’가 아니라 0%대 장기성장률이 지속되는 ‘제로성장의 빙하기’가 시작된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새 정부 1과제는 ‘제로성장’ 저지
- 그렇다면 새 정부는 어떤 경제 정책을 펴야 하나?
“정책 조합을 통한 인플레이션과 경기(景氣) 하강 대응, 성장 노력은 당연하고 더 본질적인 초점을 ‘5년 1%포인트 하락 법칙’을 깨고 ‘제로 성장’ 저지에 맞춰야 한다. 이걸 국가 정책의 지상(至上) 과제로 삼아야 한다.”
그는 이 대목에서 손을 들고 목소리를 높이며 이렇게 말했다.
“청년 취업난이 만성화하고 청년들의 좌절과 분노가 급증한 것도 결국 5년 마다 장기성장률이 추락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정부도 이 규칙을 알지 못한 채 나라 경제를 이끌어 왔다.”
- 다섯 번의 앞선 정부 모두 악순환 고리를 못 끊었다.
“그렇지만 성장률 추락의 근본 원인을 찾아내고 최근 코로나19 대응처럼 온 나라와 국민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가능하다. 이에 실패해 1%포인트 낮은 장기성장률을 다음 정부에 또 물려준다면, 한국도 일본처럼 ‘잃어버린 20~30년’을 맞을 수 밖에 없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나라의 최고 전략 자산인 인적 자본(human capital)을 창조형으로 업그레이드하고, 강화하는데 전력투구해야 한다. 이를 통해 선진국을 따라가는(fast-follower) 모방형 자본주의에서 우리가 앞장서는(first-mover) 창조형 자본주의로 고도화해야 한다.”
- ‘말’은 쉽지만 가능할까?
“창조적 인재를 많이 키우고, 창의성과 창의적 아이디어가 존중받고, 경제적으로 보상받는 사회로 탈바꿈하면 된다. 우리나라의 GDP대비 교육비 지출은 수십년 간 세계 1위지만 모방형 교육, 주입식 암기(暗記) 교육에 치우쳐 효율이 너무 낮다. 지금 학교 교육내용의 50~70%는 불필요한 것들이다.”
그는 “2013년 대입 수능시험에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회원국과 유럽연합(EU) 중 어느 지역 GDP가 더 큰 가?’라는 물음이 출제됐을 정도다. 인공지능(AI) 시대에는 쓸모없는 지식 암기 능력이 아니라 남들이 못한 새로운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만들어내는 능력이 핵심”라고 강조했다.
- 창의성과 창의적 아이디어의 가치는 어느 정도인가?
“아이디어로 나온지 10년여만에 시장 가치만 1000조~1200조원이 된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가 대표적이다. 미국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150년 넘게 2~3%대 장기성장률을 유지하며 1위 경제 대국이 된 비결 역시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부터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같은 창조적 인재들이 많아서다.”
◇서울대·삼성·행정고시부터 바꿔야
- 한국인들에게 창의성·창조적 DNA가 있나?
“1999년 카이스트 졸업생들은 미국 ‘페이스북’ 보다 먼저 ‘싸이월드’라는 소셜미디어(SNS)를 출범하고 운영을 시작했다. 세계에서 유일한 우리나라 전세(傳貰) 제도는 산업화를 촉진한 비밀 병기이자 놀라운 창의적 발명품이다. 오징어게임, BTS 같은 소프트 콘텐츠에서도 우리의 창의력은 세계적 수준임이 증명됐다.”
- 창조형 자본주의 사회를 앞당길 방안이라면?
“우리나라의 초중고·대학 교육은 입시와 취업에 맞춰져 있다. 따라서 서울대 입시와 삼성그룹 입사시험, 행정고시 문제를 모방형과 창의형으로 절반씩 섞는 방안을 제안한다. ‘남들이 생각해보지 못한 창의적인 생각을 한 것이 있으면 말해보시오’를 모든 면접시험의 필수 문제로 제안한다. 우리 국민의 잠재력은 엄청나다. 정부가 방향만 조금 틀어주면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
- 김 교수는 어떤 노력을 하나?
“15년 넘게 서울대 경제학부 강의의 절반은 창조형 수업으로 하고 있다. ‘섭씨 30도가 넘는 나라에서 얼음을 화폐로 도입하는 방법’ 같은 창의형 과제를 매주 내고, 기말고사에는 ‘한국 경제에 기여할만한 창조적인 창업 아이디어를 내라’ 같은 문제를 낸다.”
그는 “작년 2학기 기말 과제물로 창업 아이디어를 낸 학생 2명이 작년말 공동창업해 법인등록하고 올 2월 벤처캐피털 지원을 받아지난달 첫 매출을 냈다”며 “학생들을 ‘지식의 수동적인 암기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지식 생산자’가 되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창조형 자본주의가 한국의 활로
-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창의적 아이디어 같은 지식 재산권의 가치를 제도적으로 보호해주고 확실한 인센티브를 주는 한편, 이를 훔치거나 표절하는 사람은 엄벌(嚴罰)해야 한다. 일례로 코로나 19사태에서 주목받은 ‘드라이브 스루 선별진료소’ 아이디어에 원작자 이름을 붙여 정부시스템에 등록해 명예를 보장하고 정부 예산으로 경제적 보상을 해줘야 한다.”
- 기업인 등 리더들은?
“창조형 자본주의로 업그레이드가 한국 경제의 살 길임을 깨닫고 그 실현을 소명(召命)으로 삼는 창조적 리더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기업 현장에서는 사원들이 창의적 아이디어로 회사 이익을 창출할 경우 그에 비례해 파격적으로 보상해주는 시스템을 꼭 도입해야 한다.”
- 마지막으로 새 정부에 당부한다면?
“새 정부는 ‘제로성장 30년’ 또는 ‘플러스 장기성장률’ 시대를 여느냐의 역사적 분기점에 서 있다. 한국이 앞으로 연 4%씩 성장하면, 22년 만에 국민 1인당 소득이 미국을 앞설 수 있다. 단기 문제 해결에만 급급하지 말고 한국 경제의 ‘진짜 실력 키우기’에 매진하길 바란다.”
◇김세직 교수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친 뒤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1995년)인 로버트 루카스 교수의 논문 지도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루카스 교수의 이론 개발 작업에도 참여했다. 1992년부터 2006년까지 국제통화기금(IMF) 선임이코노미스트로 근무했다. 2006년부터 서울대에서 거시경제학·경제성장론·한국경제론·화폐금융론을 가르치고 있다. 다수의 논문과 함께 지난해 단독저서 <모방과 창조>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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