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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記者’ 김대중 “권위주의 시대, 신문기자가 맞서 싸울 대상 있어 행운이었다” [송의달 LIVE]

최만섭 2022. 4. 8. 05:21

 

‘58년 記者’ 김대중 “권위주의 시대, 신문기자가 맞서 싸울 대상 있어 행운이었다” [송의달 LIVE]

제66회 ‘신문의 날 ‘특별인터뷰...김대중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1980년 5월 하순 쓴 光州 민주화 운동 현장취재 기사 회한 남아”

입력 2022.04.07 11:00
 
 
 

김대중(金大中) 칼럼니스트는 한국 언론계의 ‘살아있는 전설(傳說·legend)’이다. 3주 단위로 그의 칼럼이 실릴 때마다, 그는 한국 최고령·최장수 칼럼니스트 기록을 경신(更新)하고 있다. 1965년 6월 언론계에 투신한 그는 55년간 조선일보 한 곳에서만 일했다.

김대중 칼럼니스트는 2022년 3월31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칼럼을 쓰기 위해 여러 부류 사람들과의 만남, 생활 주변, 현장을 유심히 관찰하고, 듣고, 메모한다"며 "인터넷 댓글 등에서 표현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고 했다./조선일보DB

2020년 3월31일 고문(顧問)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는 조선일보에 <김대중 칼럼>을 계속 쓰고 있다. 격주(隔週)이던 간격이 한 주 늘었을 뿐이다. 1939년생으로 올해 83세의 ‘58년차 기자(記者)’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하다. 고령(高齡)의 현역 기자들이 많은 미국에서 조차 ‘김대중’의 경륜을 능가하는 이는 없다.

◇‘칼럼 쓰는 83세 기자’...세계 언론史 기록

일례로 ‘미국 신문계의 대부(代父)’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1889~1974)은 82세에, 뉴욕타임스(NYT) 편집인·부사장을 지낸 칼럼니스트 제임스 레스턴(James Reston·1909~1995)은 80세에 퇴장했다. 그러나 ‘김대중 칼럼니스트’의 글은 지금도 당당한 직필(直筆)의 맛과 굵은 선(線), 독창적인 관점(觀點)으로 특유의 매력(魅力)을 발산하고 있다.

월터 리프먼과 그가 1920년에 쓴 책. 그는 여기서 “신문은 모든 사람들이 매일 읽는 유일한 책이다. 변호사를 기르는 법학 전문대학원처럼, 언론인을 양성하는 전문적인 저널리즘 스쿨이 필요하다”고 했다./Kyobo Bookstore
1960년 2월15일자 미국 <타임>지 표지 인물로 등장한 제임스 레스턴. '뉴욕타임스(NYT)의 기둥'으로 불린 그는 1950년대 초반 매주 평균 2건의 특종기사를 쓰는 '특종 제조기(a scoop artist)'였다. 워싱턴 지국장 시절(1953~64년)엔 탁월한 전화 취재로 유명했다./TIME

‘특별한’ 사정으로 그의 칼럼이 쉬게 되면, “무슨 일이 있는 거냐”며 쇄도해 오는 독자들의 문의전화가 이를 증명한다. 1987년 7월부터 2주 단위 정기 칼럼을 시작한 그는 지금까지 세로로 된 200자 원고지에 육필(肉筆)로, 그것도 일체의 인용(引用) 없이 전개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김대중은 <시사저널>이 실시하는 ‘영향력있는 한국 언론인’ 조사에서 1994년부터 2004년까지 1위’(1995년 제외)에 올랐고 만 80세였던 2019년까지 5위를 벗어난 적이 없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006년 5월, 그를 ‘한국의 대표 칼럼니스트’로 선정했다.

◇英 FT 선정한 ‘한국 대표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최고의 논객(論客)인 김대중 칼럼니스트는 어떤 생각과 신념으로 60년 가까운 ‘기자 외길’을 걷고 있을까? 혹시 한국의 후배 언론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일까? 기자는 이런 궁금증을 품고 제66회 ‘신문의 날’(4월7일)을 일주일 앞둔 지난달 31일, 조선일보 구관(舊館)에 있는 사무실을 찾았다.

- 요즘 자주 출근하시는가?

“보통 1주일에 2번 정도였는데 앞으로 더 많이 나올 생각이다. 살던 집을 서울에서 경기도 용인쪽으로 옮겼다가 최근 서울 강북으로 왔다.”

김대중 칼럼니스트의 조선일보 사무실에 있는 본인의 주요 칼럼 모음들. 그가 사회부장, 정치부장, 출판국장, 논설위원으로 일할 때 각각 쓴 칼럼들이다./송의달 기자

- 건강은 어떠신가?

“불편하거나 아픈 곳은 없다. 회사 다닐 때 주말마다 틈만 나면 전국의 산(山)들을 돌아다닌 덕분인지 모르겠다.”

- 주말 등에 골프 운동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다. 골프 채는 휘둘러 본 적도 없다. 신문기자가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드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권유가 많았지만 평일 낮 운동은 근무에 지장된다고 봤다.”

◇15년간 山友會 회장...“매주 전국 山 올랐다”

- 정치부장, 편집국장, 주필, 부사장 등 요직(要職)을 지내셨는데, ‘의외’이다.

“대신 나는 논설위원 시절부터 주필에서 물러날 때까지 조선일보 산우회(山友會) 회장을 15년간 맡아 회원들과 매년 20~30회 전국 명산을 찾았다. 좋다고 하는 우리나라 산은 거의 다 올라가 봤다. 2002년 당시 내 등산화만 여덟 켤레였다.”

조선일보를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파견된 주요 언론사 특파원들 사무실이 모여 있는 미국 워싱턴DC 노스웨스트(NorthWest) 14번가 소재 '내셔널 프레스 빌딩'. 이 건물 꼭대기인 13~14층에 있는 '내셔널 프레스 클럽(National Press Club)'은 수시로 세계 지도자들을 초청해 오찬 연설 등을 개최한다./조선일보DB

- 33세이던 1972년부터 79년 3월까지 워싱턴 6년6개월 근무는 여태 최장수 특파원 기록이다.

“당시 경력 7년 약간 넘은 신참 기자의 주미특파원 발령은 한국 언론계에서 ‘큰 사건’이었다. 그때 주미특파원은 고참 기자들 예우 또는 정권의 탄압을 피해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손님들을 잘 모시는 게 본업(本業)인양 여겨졌다. 내 인사(人事)를 계기로 ‘젊은 특파원’, ‘경쟁이 심화되는 특파원’ 시대가 열렸다.”

◇외신부서 첫 근무...해외 생활 8년 반

그는 서울고 재학시절 영자(英字)신문반 반장(班長)을 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후 통역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조선일보에 입사한 뒤 외신부에서 첫 1년을 보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던 1986년 여름부터 1년간 영국 연수를 했다. 노무현 정부 집권 직후 2003년 2월부터 1년간 미국에서 ‘이사(理事) 기자’로 일했다. 당시 그는 만 64세였다. 이를 포함해 해외에서 총 8년 6개월여를 보냈다.

그는 “청소년기부터 맺은 영어 및 국제뉴스와의 인연을 직업으로 발현(發顯)한 셈이다. 외신부 시절 밤에 혼자 차분히 앉아서 공부도 많이 했다. 워싱턴특파원 시절에는 하루에 200자 원고지 30여장을 기사로 써 보낸 적도 있다”고 말했다.

김대중 칼럼니스트는 지금도 펜과 원고지를 쓴다. 그는 “컴퓨터로 쓰면 글을 고치는 맛이 안 난다”고 했다. 원고지 12매 분량 칼럼을 쓰는 데 1시간 반쯤 걸린다. 일단 쓰기 시작하면 중간에 쉬지 않고 써서 완성하는 것이, 독자들이 읽을 때 흐름이 끊기지 않는 글을 쓰는 그만의 비결이다./조선일보DB

- 영국에 연수는 왜 갔는가?

“내가 정부 비판 칼럼을 못 쓰도록 전두환 정부가 강제로 떠밀어 낸 것이다. 말이 옥스퍼드대학 유학이고 연수였지, ‘강제 유배(流配)’였다. 글을 못쓰니 기자로선 불우(不遇)한 시절이었다.”

그는 2001년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영국에서 혼자 살면서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하고 지낸 날이 많았다. 수 개월 후 한국 유학생들과 가끔 어울리며 적적함을 달랬고, 담배를 끊어가지고 돌아왔다”고 했다.

- 기자로서 이루지 못한 게 있다면?

“미국에서 돌아온 뒤 수년 후 ‘일본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회사에 일본특파원 근무를 자원(自願)했다. 그러나 ‘당신만 다 하냐’는 반응이 많아 못 갔다. 일본특파원을 했더라면 ‘국제문제와 한국 정치’라는 문제의식을 발전시키고 글도 다양해졌을 것이다.”

◇“편집국장 일찍 마치고 글쓰기 집중”

- 편집국장은 1년 남짓만 하고 물러났다.

“2~3년 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다. 어수선한 사내 상황에 책임을 지고 1990년 3월 편집국장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이사(理事) 주필(主筆)’로 발령났다. 국장 근무는 짧았지만 글 쓰는 프론트라인(frontline·전선)에 일찍 와 집중할 수 있었다.”

“혹시 회한(悔恨)이 남는 일이 있는가?”라는 기자의 물음에, 그는 “1980년 5월 하순에 쓴 광주(光州) 민주화 운동 현장취재 기사가 그렇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희생된 시민들의 무덤이 있는 광주광역시 망월동의 구(舊) 묘역(墓域) 모습/조선일보DB

“1980년 5월24일, 서울 시내 모든 신문·방송사 사회부장들이 국방부 수송기를 타고 광주에 도착해 자사의 취재 기자들을 격려하고 현장 상황을 둘러봤다. 서울로 돌아와 나는 현장에서 본 내용으로 취재기를 쓰고자 했는데, 비상계엄 상태로 기사를 인쇄하기전 물에 젖은 종이대장을 들고 서울시청 2층에 있던 언론검열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원고에서 시위자들에 대해 ‘폭도(暴徒)’라는 단어를 한 번도 안 썼더니 퇴짜를 맞았다. 귀사해 상의 끝에 맨 첫 문장에서 한 번만 ‘난동자(亂動者)’라고 쓰고 나머지는 ‘그들은’ ‘그들은’으로 표현한 기사를 내보냈다. 타사 부장들은 아무도 기사를 쓰지 않았다. 당시에선 그 정도 기사라도 나간 거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후 ‘왜 난동자라고 했느냐’며 두고두고 비난을 받았다.”

그는 “기사를 아예 쓰지 말 건가 또는 타협해 낼 것인가 가운데, 나는 기사 내는 걸 택했다. 어떤 판단을 내렸으면 좋았을지 아직도 확실하게 모르겠다. 안 썼으면 나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언론인으로서 럭키한 시대 살았다”

특파원 근무를 마치고 귀국해 외신·사회·정치부장을 잇따라 지낸 그는 출판국장·편집국장을 거쳐 논설위원과 주필, 고문을 맡았다. 부국장은 물론 차장대우, 부장대우 같은 대우(待遇) 직급 한 번 없이 직진(直進)했다.

- 지금까지 ‘57년 신문기자’로 질주한 소감이라면?

 

“나는 언론인으로서 참 럭키(lucky)한 시대를 살았다. 기자로서 활동한 지난 세월은 우리나라가 군사독재, 민주화, 산업화, 정보화 등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일들을 압축적으로 통과한 시간이었다. 특히 권위주의 시대에 신문기자가 맞서 싸울 대상이 있었던 게 행운이다. 우리나라가 겪었던 고비고비마다 신문이 수행하는 역할이 매우 컸다. 조선일보라는 크고 전통있는 신문사에 몸담은 것도 큰 복(福)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 칼럼니스트가 조선일보 주필 시절 논설실에서 ‘원탁회의’를 주재하는 모습. 오른쪽부터 당시 류근일 논설주간, 김대중 주필, 고학용·김형기·김기천 논설위원/조선일보DB.

- 언론계 입문 당시와 지금을 견줘본다면?

“입사 당시 10만부 남짓하던 조선일보 발행부수가 재임 중 230만부까지 늘었었다. 양적(量的) 성장 못지않게 ‘신문에 이렇게 났는데’라는 게 만사(萬事)를 판단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이었다. 스마트폰 보급 후 신문의 역할과 영향력이 많이 줄었지만….”

◇“인류 존재하는 한, 활자 매체 살아남을 것”

- ‘신문의 날’ 66주년인데 ‘신문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가?

“신문은 기록성과 영속성에 관한 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받아왔다. 개개인이 기자가 되고 소셜미디어(SNS) 범람 등으로 신문의 독점적 지위가 많이 희석됐다. 그러나 활자(活字) 매체만의 기록성과 영속성은, 적어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되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믿는다.”

- 한국 기자들의 사기(士氣)가 많이 떨어져 있다.

“활자 매체의 쇠락은 한국적 현상 만이 아니다. 프랑스 르몽드나 독일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너자이퉁, 뉴욕타임스 등 모두 크게 위축돼 있다. 그동안 활자 매체들이 과잉대접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흐름임을 인정하고 생존법을 찾아야 한다.”

미국 뉴욕 맨해튼 웨스트(West) 41번가와 42번가 사이에 위치한 뉴욕타임스 본사 로비 모습. 수백개의 진공 형광 디스플레이(Vacuum Fluorescent Display·VFD)가 양쪽 벽에 설치돼 있다. 각 화면에는 기사 본문 일부와 독자들의 댓글 등이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아래 사진은 화면을 가까이서 본 모습. 지상 52층인 이 건물은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설계했다. 로비 사진은 2015년 모습/조선일보DB

그는 2020년 3월31일 조선일보 편집국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엄청난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니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그것은 ‘기자 정신(精神)’과 ‘글 쓰기’이다”며 이렇게 말했다.

“기자 정신은 신문을 만드는 주체인 기자의 문제의식과 비판 정신을 말한다. 미국 펜타곤 페이퍼 보도와 워터게이트 스캔들 추적 보도에서 용기있는 비판의식의 정수(精髓)를 봤다. ‘기자(記者)’의 한문적(漢文的) 의미는 ‘무엇을 쓰는 사람’에서 비롯됐다. 기자라면 모름지기 글을 바르게 정성스럽게 써야 한다.”

2020년 3월 31일 김대중 당시 조선일보 고문이 서울 중구 정동(貞洞) 조선일보 편집국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퇴임사를 읽고 있다./조선일보DB

◇“文才 부족하면 열정 갖고 노력해야”

- ‘글 쓰기’의 요체는 무엇인가?

“세 가지이다. 먼저 주제를 잘 고르고 초점있게 구성해 독자에게 메시지를 잘 전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확한 어휘와 단어 선택이다. 어휘 하나만 잘 골라도 글 전체가 확 살아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나름의 글쓰는 재주, 문재(文才)가 있어야 한다. 운동선수에게 운동감각처럼.”

- 문재(文才)가 부족한 사람은 좋은 기자가 될 수 없나?

“문재가 아예 없다면 기자로서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문재가 부족하면 열정(熱情)을 갖고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열정과 노력 모두 없는 사람은 ‘생계형 기자’로서도 부적격이다.”

그는 “신문사는 기자를 훈련시키거나 키우는 곳이 아니고, 기자의 열매를 따먹는 곳이다. 기자는 완성도 높은 글을 신문사에 세일즈(sales·판매)하는 시스템으로 가야 하고 지금 그렇게 가고 있다”고 했다.

2022년 4월6일 낮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66회 신문의 날' 기념식에서 임채청 한국신문협회 회장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을 포함한 참석자들이 함께 박수치고 있다./연합뉴스

◇“‘직급’ 매달리면 ‘좋은 기자’ 될 기회 놓쳐”

- 21세기에 기자들은 어떻게 생존해야 할까?

“기자는 이런 상황을 거꾸로 이용해야 한다. 자기의 자질, 즉 가치(價値)와 몸값을 최대한 높여 회사로부터 더 나은 대우를 받도록 해야 한다. ‘내 글이 빠진다면 어떻게 신문을 제대로 만들겠나’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생길 수 있도록 전력투구해야 한다.”

- 디지털 혁명과 전문화 시대를 맞아 한국 언론계가 바뀌어야 할 점이 있다면?

“기자들의 의식(意識)이 관료처럼 된다는 점이다. 직급(職級), 즉 ‘자리’에 매달리면 좋은 기자가 될 기회를 놓치기 쉽다. 세상 사람들은 좋은 글, 잘 쓴 기사를 읽고 기자의 이름과 취재력, 문제의식으로 인정해주지 무슨 차장, 무슨 부장, 무슨 국장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2005년 11월 3일 서울 고려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토론회에 온 돈 오버도퍼 당시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원 교수가 특별강연하고 있다./조선일보DB

◇“부장, 국장 마치고도 취재하는 관행 정착돼야”

그러면서 그는 고(故)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 워싱턴포스트 국제문제 기자와의 일화(逸話)를 꺼냈다.

“오버도퍼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그에게 ‘당신은 기자 경력이 꽤 오랜데 왜 아직 부장 타이틀을 못 달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하더라. ‘회사에서 나 보고 외신부장 하라고 해서 당장 그만두겠다고 했다. 데스크는 기자에게는 지옥(地獄)이다. 세계로 나가 세상 사람을 만나 취재하려고 기자하는 것이지, 데스크에 앉아 남의 글이나 손질하려고 기자하는 것이 아니다’고.”

김대중 칼럼니스트는 “처음부터 ‘데스크 안 한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부장하다가 평기자로 가고, 국장 지낸 뒤에도 취재에 나서는 관행이 정착돼야 한다. 편집국의 전(全) 기자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자리’에 연연하며 출세(出世)하려 하기에 세상은 너무 포화 상태이다. 글 쓰는 기자만 살아남는다. ‘좋은 글을 잘 쓰는 기자’로 남는 게 시대 변화에 순응하는 길이다”고 밝혔다.

- 회사도 글 쓰는 전문기자를 우대해 줄 필요가 있지 않나?

“회사가 해주기 전에 기자 개인의 노력과 성과가 먼저다. ‘글’로 승부해 인정받아야 한다. 기자가 글 쓰는 본업에 충실하면 직업인으로서 전문성과 긍지가 생기고, 조직 안에서 직급은 절로 따라온다.”

김대중 칼럼니스트가 1982년에 낸 첫번째 저서. 6년 6개월간 미국에서 보고 경험한 미국 정치와 사회, 언론, 한미 관계 등에 대한 글들을 모았다./송의달 기자

◇“미국 언론계의 투철한 직업의식”

그는 1982년에 낸 저서 <워싱턴의 사계(四季)> 내 ‘언론의 직업의식’ 절(節)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 언론은 정치에 영향을 끼치고 정치를 적당히 쥐고 있지만 스스로 정치와는 섞이지 않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신문기자가 의회에 진출한 경우는 아직 본 일이 없다.(중략) 미국의 언론이 정치와 권력을 죄악시해서 그건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오히려 언론계의 철저한 직업의식 때문인 것이다. 그들의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은 아마도 미국 언론의 힘 자체 보다 더욱 강한 것 같다.”(84~85쪽)

- 본인도 수차례 입각(入閣) 제의를 받은 걸로 알고 있다.

“김대중 정권 등에서 같이 일할 수 있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자기들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못쓰게 하려는 의도임을 알고 거절했다. 신문사 밖으로 외도(外道)하지 않고, 경제적 여유를 억지로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당하다고 자부한다.”

그의 말이다.

“임원이 될 때, 만 65세 정년퇴임할 때, 2020년 고문에서 물러날 때. 이렇게 세 차례 퇴직금을 받았지만 그때 마다 목돈이 아니었다. 이재(理財)에는 관심도, 재주도 없었다. 한때 연말 상여금을 계열사 주식으로 받았다가 거의 다 날려 먹었다.”

유력 신문사 간부로 오래 근무해 적지 않은 부(富)를 모았을 것이라는 세간의 추측과 정반대라는 얘기이다.

2001년 출간된 <김대중 주필의 직필>. 그는 이 책 서문에서 "우리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중요한 덕목은 오늘을 살되 치열하게 살면서 '있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없는 것'을 가차없이 들춰내는 것"이라고 했다. 또 "오늘날 언론 종사자에 대한 가슴 아픈 비판은 우리가 우리의 존재이유인 '오늘'마저도 허술히 적당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라고 썼다./송의달 기자

◇“권력, 不義한 돈과 거리둬야”

- 본인의 기자 인생을 자평(自評)한다면?

“‘빽’이니 뇌물 같은 거 없이 성실하게 실력껏 노력하면 되는 직장에서 일했고, 아부 안하고 자유롭게 말하고 마음껏 글 쓸 수 있어 좋았다. 돈과 연관되지 않고 비교적 깨끗하게 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신문의 전성기 때 기자 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나는 행운아다.”

- 후배 기자들이 존경받는 언론인이 되려면 어떡해야 할까?

“기자직(職)을 이용해 권력에 기대거나 권력을 누리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또 불의(不義)한 돈을 찾거나 불의하게 돈을 모으려 해선 안 된다. 경제적으로 잘 살려 노력해야지만. 이 두 가지와 거리두고 깨끗해야 한다.”

 
 
△조선일보 홍콩특파원,디지털뉴스부장, 산업1부장, 오피니언 에디터, 조선비즈 대표이사 △<뉴욕타임스의 디지털 혁명>(2021년), <세상을 바꾼 7인의 자기혁신 노트>(2020년),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 의회>(2000년) 등 단독 저서 6권 △서울대 외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 워싱턴DC 소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초청연구원 및 조지타운대 외교대학원(School of Foreign Service) Mid-Career Program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