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도 좌파 대통령… 중남미 ‘핑크 타이드’에 중·러 영향력 확대
결선투표서 ‘극좌’ 대통령 당선, 콜롬비아·브라질도 좌파 집권 전망
바이든이 중남미 대책 못 내놓고 코로나·경제난 때문에 좌파 득세
중·러, 인프라 투자·백신 제공 등 중남미에 경제적 지원 가속화
칠레에서 사회주의 좌파가 보수우파 정권을 밀어내고 5년 만에 다시 집권하게 됐다. 앞서 멕시코와 아르헨티나에서 좌파 정권이 들어선 데 이어, 내년 콜롬비아와 브라질 대선에서도 각각 현 우파 정권이 좌파로 교체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경제난이 심화하고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하는 가운데 좌파가 속속 집권하는 핑크 타이드(Pink Tide·분홍 물결) 파고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의 뒷마당인 중남미의 정세 변화를 틈타 중국과 러시아가 세력을 넓히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19일(현지 시각) 치러진 칠레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좌파 연합 단일 후보로 나선 가브리엘 보리치(35)는 우파 연합의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55) 후보를 10%포인트 이상 앞서며 승리했다. 칠레 학생운동 지도자 출신의 정치 신인 보리치는 “칠레를 신자유주의의 무덤으로 만들겠다”며 증세와 사회지출 확대를 공약했다. 앞서 칠레에선 2019년 지하철 요금 30페소(약 50원) 인상 방침에 전국에서 수백만 명이 반정부 시위를 벌인 데 이어, 올 5월 제헌의회 선거에서 좌파 후보가 대거 당선되고 수도 산티아고 시장에 공산당 후보가 당선되면서 좌파 득세가 본격화됐다.
이는 2~3년 전부터 중남미에 다시 불고 있는 핑크 타이드를 명확하게 보여준 가장 최근 사례다. 이달 초 온두라스 대선에선 ‘민주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시오마라 카스트로(62·여) 후보가 대만과 단교, 중국과의 수교를 통한 투자 유치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미국 압력으로 온두라스와 대만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지 않았지만 파장은 컸다. 지난 6월 페루 대선에선 선출직 경험이 전무한 교사 총파업 리더 출신의 사회주의자 페드로 카스티요(51)가 우파인 게이코 후지모리를 꺾고 당선됐다. 2020년 10월 볼리비아 대선에서도 좌파인 루이스 아르세 대통령이 우파 정권을 꺾고 집권했다.
앞서 2019년 아르헨티나에선 과거 선심성 복지를 뜻하는 ‘페론주의’를 표방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62) 대통령이 높은 물가 등 경제난에 지친 국민의 마음을 파고들며 좌파 정부를 복원했다. 미국과 국경을 맞댄 멕시코에선 2018년 중도 좌파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70) 대통령이 당선, 공화정 출범 후 89년 만에 처음 좌파 정부가 출범하기도 했다.
중남미 핑크 타이드는 당분간 더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당장 내년 5월 대선을 앞둔 콜롬비아에서는 이반 두케(45) 현 대통령의 우파 정권 지지율이 폭락, 좌파 야권이 집권을 노리고 있다. 내년 10월 대선이 실시되는 브라질에선 중남미 ‘좌파의 아이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76) 전 대통령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자이르 보우소나루(66) 대통령을 더블 스코어로 앞서고 있다.
중남미 국가들은 과거 유럽의 식민 지배와 미국의 영향력에 대한 논란,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는 불안한 경제 탓에 극단적 좌파·우파를 오가는 정치 실험을 반복해왔다. 지난 1999년 베네수엘라에 각종 무상 복지와 반미(反美) 포퓰리즘을 내세운 차베스 정권이 들어선 이후 15년여 남미 12국 중 10국에 좌파 정권이 속속 들어서면서 ‘1차 핑크 타이드’로 불렸다. 당시 중국이 중남미 원자재 최대 수입국으로 떠오르고, 일대일로 사업 등으로 중남미 투자를 본격화하면서 사회주의 경제를 떠받쳐줬다. 그러나 원자재 가격이 떨어지고 돈풀기 정책으로 각국 재정이 파탄 나자 2015년쯤부터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 등 ‘남미의 ABC’ 주요국에 기업과 시장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우파 정권이 속속 들어섰다.
하지만 미 트럼프 정부가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남미에서 손을 떼고, 중국과 러시아가 그 빈틈을 파고들면서 중남미 우파 물결은 곧 퇴조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해부터 중남미가 코로나 팬데믹의 직격탄을 맞고 민생난이 심화되자 각국 국민들이 과거의 달콤한 복지 국가를 그리워하며 ‘2차 핑크 타이드’를 낳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 바이든 정부 역시 국내 팬데믹과 경제 위기 대응 때문에 중남미발 불법 이민자를 막는 데 급급, 아무런 중남미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중·러의 중남미 진출은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다. 중국은 대만의 오랜 수교국들을 막강한 자금력으로 공략하며 잇따라 단교시키고 있다. 중국은 대만 독립 성향이 강한 차이잉원 총통 집권 뒤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여 파나마(2017년 6월), 도미니카공화국(2018년 5월), 엘살바도르(2018년 5월)와 전격 수교했다. 이달 초엔 니카라과와도 재수교했다. 대만 수교국으로 남아 있는 온두라스·파라과이·과테말라·벨리즈 등에 대한 외교적 공세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중남미 국가에 코로나 백신을 제공하고,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제안하고 있다. 미 정치 전문 온라인 매체 액시오스는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의 친구들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중국에 잃고 있다”고 했다. 월드뱅크에 따르면 1999년 남미 모든 나라의 역외 최대 교역국이 미국이었다면, 현재는 대부분이 중국이다. 그만큼 중국이 무역·외교 역량을 집중한 결과다.
러시아도 중남미에서 과거 소련 시절의 영향력 복원을 꾀하고 있다. 러시아도 국제 제재를 받고 있는 베네수엘라와 쿠바, 니카라과 등 반미 좌파 독재국에 대한 경제·안보 지원에 집중하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는 지난달 자국 제조 코로나 백신을 니카라과에서 현지 생산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발표했다. 또 아르헨티나에 양국 간 무역 대금 결제를 루블화나 페소화로만 하자며 달러화 배제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핑크 타이드(pink tide·분홍 물결)
중남미에 온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현상. 공산주의 유행을 뜻하는 ‘붉은 물결(red tide)’과 구별해 쓴다. 1990년대 말부터 2014년까지 남미 10국에 복지 확대를 내건 좌파 정권이 들어선 것이 1차 핑크 타이드였다. 이후 우파가 집권했다가 최근 좌파가 복귀하는 현상을 2차 핑크 타이드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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