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 서거-2021.10.26

전두환과 12·12 쿠데타… 6·29 선언후 직선제 개헌으로 대통령에

최만섭 2021. 10. 27. 04:45

전두환과 12·12 쿠데타… 6·29 선언후 직선제 개헌으로 대통령에

[노태우 1932~2021] 군사정권의 후계자

최경운 기자

입력 2021.10.27 04:39

 

 

 

 

 

김영삼·김종필과 함께 3당 합당 - 노 전 대통령이 1990년 1월 22일 청와대에서 김영삼(왼쪽)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함께 ‘3당 합당’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26일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79년 친구이자 전임자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12·12 군사반란을 성공시키며 대한민국 역사의 소용돌이에 들어섰다. 전두환 신군부와 5공(共) 정권 내내 이인자의 삶을 보낸 끝에 1987년 부활한 직선제 대선에서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6·10 항쟁으로 분출한 민주화 요구를 수용해 유혈 충돌 없이 민간 정권으로 이양을 이끌어냈고 5공 청문회 등을 열어 전두환 정권과 단절도 시도했다. 재임 중 소련 해체기를 맞아 북방 외교를 펼쳐 한국 외교의 지평을 넓혔다. 반면 퇴임 후 12·12 군사반란 혐의 등으로 처벌받았다. 전 전 대통령과 함께 그에게 제기된 5·18 진압 책임론은 평생의 멍에가 됐다.

노태우 前 대통령이 걸어온 길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 4일 경북 달성 신용리(현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북고를 졸업하고 육사 11기로 군문(軍門)에 들어섰다. 육사에서 필생의 정치적 동지이자 후원자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 등 동기생들과 함께 친목 모임으로 만든 ‘5성회’가 1963년 하나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1959년 육사 동기 김복동의 동생 김옥숙 여사와 결혼했다.

고인은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한 후 방첩부대 방첩과장과 육군본부 정보과장 등을 거쳤다. 월남전 참전 후에는 육군참모총장 수석 부관, 공수특전여단 여단장 등을 거쳐 1978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때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됐다.

고인은 1979년 12·12 당시 9사단장으로서 예하 29연대를 중앙청에 진주시키는 등 군사 반란에 가담했다. 5공 정권 출범 후 1981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고인은 곧바로 전 전 대통령이 창당한 민주정의당에 입당했다. 전두환 정권에서 정무 2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민정당 대표 등을 지냈다.

법정에 나란히 선 노태우와 전두환 - 1996년 8월 26일 법원에서 열린 12·12 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관련 선고 공판에서 노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손을 잡고 법정에 서 있다.

전 전 대통령 재임 7년을 이인자로 버틴 그는 1987년 직선제 개헌 요구를 전격 수용한 6·29 선언을 했다. 고인은 1987년 대선에서 ‘보통 사람의 시대’를 내걸고 당선됐다. 선거 때 그가 구호처럼 언급한 “믿어주세요”란 말은 나중에 유행어가 됐다. 박정희의 유신 선포 이후 15년 만의 첫 직선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 집권 후 민주화 요구가 분출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되면서 정국 불안에 시달렸다. 결국 그는 1990년 김영삼·김종필과 손잡고 218석의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을 소외시켜 “지역구도를 심화한 야합”이란 비판도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전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냈다. ‘5공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에도 동의해줬다. 그러나 전면적 5공 청산과는 거리가 있었다.

1987년 6·10 항쟁으로 분출된 민주화 요구를 큰 유혈 희생 없이 제도적으로 수용해낸 점은 노 전 대통령의 공(功)으로 평가하는 학자가 적지 않다. 그는 재임 중 ‘물태우’라 불리며 반대파로부터 조롱을 받았지만 역으로 이런 그의 정치적 캐릭터가 과도기를 유혈 충돌 없이 넘겼다는 것이다. 고인은 생전 인터뷰에서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는 과정을 보면 물의 힘은 참 크다. 물 대통령이란 별명 잘 지어주었다”고 했다.

서울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한 노태우 -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한 노 전 대통령과 부인 김옥숙 여사 모습이다. /연합뉴스

그의 재임기에 각계의 민주화 요구가 분출됐다. 이런 상황에서 성장 일변도 정책 추진은 불가능해졌다. 대신 농어촌 부채 탕감, 토지공개념 도입, 주택 200만호 건설 등 복지와 형평 우선주의 기조도 도입했다.

자신의 후임자인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후 12·12 군사반란 참여와 5·17 내란 혐의, 재임 중 2628억원 비자금 조성 혐의로 전 대통령과 나란히 법정에 섰고 유죄가 확정됐다. 고인은 지난 2013년 동생과 재산반환 소송을 벌이면서까지 추징금 2628억원을 다 냈다. 추징금을 완납하면서는 “1만분의 1의 도리를 했다”고 했다. 아들 재헌씨는 재작년부터 매년 광주를 찾아 5·18 민주묘지에 참배하고 희생자 가족들과도 만났다. 재헌씨는 “신군부의 일원이었던 아버지가 책임을 통감하고 사죄해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하다”고 했다.

 

 

최경운 기자

 

조선일보 사회부, 특별취재부, 정치부, 논설위원실을 거쳐 지금은 정치부에서 정당을 취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