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진보, 보수’ 舊체제가 무너진다
與 ‘진보’에 무임승차… 10년 이상 ‘진보, 보수’ 구도
文정부 진보 가치 후퇴·혼돈, 진보 일부 ‘정권 교체’ 승차
입력 2021.03.29 03:00 | 수정 2021.03.29 03:00
믿기지 않겠지만 지금 민주당분들은 민주화 투쟁 시절 ‘진보’라는 말을 내켜 하지 않았다. “우린 진보가 아니라 민주 개혁, 애국 세력”이라고 했다. ‘진보’라는 말보다 민주가 더 대중적, 즉 표에 도움이 된다고 봤다.
4·7 보궐선거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25일 오후 시민들이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 집 울타리에 부착된 선거 벽보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1992년 대선이 그랬다. 전대협과 NL(민족해방) 진영은 평소 연방제 통일 노선을 취했지만 대선이나 총선 때는 김대중 정당과의 연합을 추진했다. 좌파 단독 집권이 불가능하니 김대중 진영과 연대해 정권을 교체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때만 되면 붉은 머리끈을 잠시 풀고 노란 깃발을 들었다. ‘민주정부론’을 주창했고, 때론 ‘애국’이라는 우파 레토릭도 빌렸다. 그들은 ‘진보 대 보수’는 관념적이라며 ‘민주 대 반(反)민주’로 규정했다.
반면 PD(민중민주) 계열은 선거에서 사회주의를 선전하려 했다. 하지만 국보법 때문에 사회주의 대신 ‘진보’를 간판으로 걸었다. 그렇게 출마했던 대통령 후보가 백기완이었다. 1992년 겨울, 잠실 사이클경기장 군중 속에서 ‘진보’라는 대형 깃발이 올랐다. 한국 정치사에 ‘진보’가 커밍아웃한 사실상의 첫 순간이었다. 이들은 ‘민주, 반(反)민주’가 허위 구도이며 ‘진보, 보수’ 전선을 만들려 했다.
사회주의의 다른 이름이던 ‘진보’는 2004년 민주노동당 의회 진출 이후 제도권에 등장했고, 지금의 ‘진보, 보수’ 구도가 만들어졌다. 민주당이 ‘진보’에 무임승차하자, 반대 진영도 급하게 ‘보수’의 이름표를 달았다. 이후 10년 이상 ‘진보, 보수’ 구도가 이어졌다. 역설적이지만 이때부터 ‘진보’의 수난이 시작됐다. 북한 인권을 외면하고 탄소 중립을 한다며 대규모 토목 공사로 자연을 훼손하는 공항을 추진한다. 반핵(反核)을 외치던 사람들이 북한 핵무기는 못 본 척한다. 공정을 강조했던 이들이 특권을 대물림하고, 평등을 외치며 빈부 격차를 키웠다. 차별을 금지하자며 동성애 문제만 나오면 모르쇠가 된다. 의석수를 앞세워 의회주의를 절멸시켰다. 진보에 무임승차한 세력이 진보의 단물을 빨더니 누더기로 만들어버렸다.
‘한국형 진보’라는 주장도 있다. 서구 사상을 한국 현실에 적용하다 이리됐다는 말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일본의 몇 가지 풍경이 떠오른다. 일본에는 허구의 유럽을 모델로 한 정체불명의 근현대 건축물이 적지 않다. 일본인들은 “유럽보다 더 유럽 같다”며 자위한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진보를 만들어놓고 “한국형 진보”라고 하는 이들과 많이 닮았다.
여권은 다음 달 보궐선거와 내년 대선을 ‘진보, 보수’ 구도로 치르고 싶어한다. 허나 어쩌랴, 문재인 정부 4년은 이런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진보 편에 섰던 많은 분이 ‘정권 교체’ 열차에 올라탔고, 야권과의 관계를 고민하고 있다. 민주당에 등 돌린 진보와 중도와 개혁적 보수가 한 배를 타는 연합 전선이 구축될 수도 있다. 현 집권층이 거리에서 싸우던 시절의 ‘민주, 반(反)민주’ 전선이 30년 뒤 ‘민주당 대 반(反)민주당’으로 부활하는 셈이다.
진보 같지 않은 진보와 보수답지 않은 보수가 국민을 인질로 이권을 나누던 구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구질서는 해체되고 있지만 아직은 혼돈이다. 공정, 젠더, 생태 때론 획일적 반일(反日), 반중(反中) 같은 배타적 민족주의까지 생소한 가치들이 충돌한다. 그러나 야당이 반사이익에 취해 과거로 회귀한다면 지난 10년 ‘진보, 보수’ 구도의 기득권들이 좀비처럼 부활을 노릴 것이다. 새 질서를 창출하기 위한 2021년의 첫 전장(戰場)은 4월 7일 서울과 부산이다.
정우상 정치부장
사실이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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