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몸이 된 룰라, 브라질 대선 핵으로
대법 “수뢰혐의 실형 선고 모두 무효”… 내년 대선 재출마길 열려
입력 2021.03.10 03:00 | 수정 2021.03.10 03:00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이 지난 2019년 부패 혐의로 복역하다 조기 출소하며 지지자들에게 화답하는 모습. 부패 실형 선고로 2018년 대선에 출마하지 못했던 그는 이번에 대법원이 과거 실형에 대한 무효화를 결정하면서 2022년 대선 출마길이 열리게 됐다. /AP 연합
정치적 재기를 노려온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75) 전 대통령이 대법원 판결로 부패 혐의를 벗으면서 2022년 대선에 재출마할 가능성이 커졌다. 현 자이르 보우소나루(65) 대통령의 재선 가도에 큰 변수가 생기면서 남미 최대 국가인 브라질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브라질 연방대법원은 8일(현지 시각) 뇌물 수수 혐의로 기소된 룰라 전 대통령에 대한 하급심의 실형 선고를 모두 무효화한다고 밝혔다. 브라질엔 항소심 이상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정치인의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규정(‘피샤 림파’·깨끗한 경력)이 있고, 룰라는 이 때문에 2018년 대선에 출마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모든 법적·정치적 족쇄가 풀렸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이 2020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명예 파리 시민증 수여식에 참석해 손을 흔들고 있다. 브라질 연방대법원이 8일(현지 시각) 뇌물 수수 혐의로 기소된 룰라 전 대통령에 대한 하급심의 실형 선고를 모두 무효화하면서 룰라가 오는 2022년 대선에 재출마할 가능성이 커졌다. /EPA 연합뉴스
브라질에선 2014년부터 시작된 ‘라바 자투(Lava Jato·세차용 고압분사기)’란 이름의 권력형 부패 수사로 룰라가 소속된 집권 노동자당과 좌파 진영이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룰라 전 대통령은 대형 건설 업체 편의를 봐주고 해변 아파트 한 채와 현금(약 9억여원)등 뇌물을 받고 돈세탁을 했다는 혐의로 2017년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고, 2019년까지 1년 반가량 복역했다. 룰라의 정치적 후계자인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도 이 수사로 인해 2016년 탄핵당했다.
그러나 2019년 이 사건을 담당한 판사와 검사가 서로 담합해 룰라를 무리하게 기소했다는 정황이 언론 보도로 드러났고, 이를 계기로 룰라와 좌파 진영은 반격에 나섰다. 룰라는 1년 반 복역한 후 2019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또 룰라에 유죄 판결을 내렸던 판사가 현 보우소나루 정권에서 법무장관으로 직행하면서 논란이 커졌고, 정권 차원의 부패 척결 TF는 해산됐다. 이날 대법원이 룰라의 실형 선고를 소급해 무효화한 이유도 “룰라에 대한 수사와 법원의 판결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브라질 연방대법원이 룰라 전 대통령의 복권 조치를 발표한 8일, 전국학생연합 등 룰라의 지지자들이 "룰라 대통령을 원한다"라고 적은 현수막을 들고 상파울루에서 축하 행진을 벌이고 있다. /로이터 연합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구두닦이, 철강 노동자 출신인 룰라는 오랜 군부 독재하에 있던 브라질의 첫 좌파 대통령으로 2003년 당선돼 8년간 재임했다. 실용주의·중도 좌파의 기치를 내걸고 분배와 성장 정책을 고루 구사했으며, 보수 인사도 중용하는 등 브라질 경제와 민주주의를 회생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0년 후계자 호세프 대통령에게 바통 터치를 하고 퇴임할 땐 저소득층의 절대적 인기 속에 지지율이 87%에 달했다.
그러나 후임 좌파 정부의 과도한 복지 정책으로 경기가 침체되고 부패 스캔들이 겹치면서, 브라질 정권은 2018년 ‘열대의 트럼프’로 불리는 극우 성향 보우소나루로 넘어갔다. 그러나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군사독재 찬양과 소수자 탄압, 정적·언론에 대한 막말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보우소나루는 코로나 발발 초기부터 “가벼운 독감”이라며 심각성을 무시하는 등 코로나 방역에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국제통계사이트 월드오미터에 따르면 8일 기준 브라질의 코로나 누적 확진자는 1105만5000여 명, 사망자는 26만6000여 명이다. 사망자는 미국 다음 세계 2위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이 지난 2월 대통령궁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그는 코로나 방역 실패 책임론에 휩싸인 상황에서도 지난 4일 국민들에게 "코로나로 그만 징징대라"고 말해 또 논란이 됐다. /AFP 연합
좌파 진영은 반(反)보우소나루 기류 속에 룰라를 중심으로 빠르게 결집해왔다. 최근 브라질의 한 대선 여론조사에선 룰라 지지율이 50%,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38%로 나왔다. 재선 가도에 비상이 걸린 보우소나루는 이날 “브라질 국민은 부패 혐의가 있던 정치인이 다시 대선에 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룰라의 복귀가 가시화되자 브라질을 넘어 남미 좌파 벨트까지 들썩이고 있다. 8일 브라질 대법원의 룰라 복권 결정에 아르헨티나의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정의가 실현됐다”는 성명을 냈다. 그동안 룰라 진영은 룰라가 기득권층에 의한 사법 전쟁의 희생자라는 내용의 ‘위기의 민주주의’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등 여론전을 해왔다. 룰라가 내년 대선에서 바람을 일으킬 경우, 최근 수년간 퇴조했던 남미 좌파 물결(pink tide)이 되살아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뉴욕에서 미국과 한국의 여러가지 문제를 보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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