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병아리 감별사 아들, 칸의 신동, 골든글로브… “가족의 힘 보여줬다”

최만섭 2021. 3. 2. 05:06

병아리 감별사 아들, 칸의 신동, 골든글로브… “가족의 힘 보여줬다”

[’미나리' 골든글로브 수상] 美이민 2세대 정이삭 감독, 자신의 이야기로 세계를 감동시키다

김성현 기자

입력 2021.03.02 03:00 | 수정 2021.03.02 03:00

 

 

 

 

 

<YONHAP PHOTO-1766>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한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 (베벌리힐스 AFP=연합뉴스) 미국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의 베벌리 힐튼 호텔에서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열린 제7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받은 '미나리'의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이 딸과 함께 영상에 등장해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정 감독은 영화 제작에 참여한 배우와 스태프들, 가족들을 일일이 언급하며 감사를 표했다. [NBC 유니버셜 제공. 판매·광고·DB 금지] sungok@yna.co.kr/2021-03-01 14:14:54/ <저작권자 ⓒ 1980-202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내가 기도했어요(I prayed)!”

영화 ‘미나리’를 연출한 리 아이삭 정(정이삭) 감독의 일곱 살 난 딸이 아빠를 얼싸안으면서 “내가 기도했어요”라고 세 번이나 외쳤다. 1일(한국 시각) 미국에서 열린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미나리’가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수상작으로 발표되는 순간이었다. 이날 주요 부문 수상자들은 시상식에 참석하는 대신 자택에서 온라인 영상으로 수상 소감을 전했다. LA에 살고 있는 정 감독은 안고 있는 딸을 바라보면서 “그녀야말로 내가 이 영화를 만든 이유”라고 소개했다. 정 감독의 딸이 아빠를 안으면서 외치는 이 영상은 전 세계 SNS에 공유되며 화제가 됐다.

영상 수상 소감에서 그는 “‘미나리'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가족은 자신들만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그 언어는 영어나 다른 어떤 외국어보다도 깊다. 바로 마음의 언어(a language of the heart)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첨부용**미나리

그의 수상 소감처럼 영화 ‘미나리’는 재미 교포 2세인 감독 자신의 자전적 경험이 투영된 작품이다. 1980년대 미국으로 건너간 한인 가족이 남부 아칸소의 시골 마을에 정착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담았다. 영화처럼 이민 1세대인 정 감독의 아버지 역시 주인공 제이컵(스티븐 연)처럼, 병아리의 성별을 구별하는 감별사로 19년간 일했다. 이 때문에 정 감독이 다섯 살 때 그의 가족도 콜로라도 덴버에서 아칸소로 이사했다. 한국 채소를 가꾸기 위해 손수 트랙터를 몰고 농장을 가꾸는 영화의 설정도 아버지의 모습에서 가져왔다. 그는 지난해 선댄스 영화제 직전에 부모에게 영화를 보여드렸다. 정 감독은 당시 미 언론 인터뷰에서 “부모님께서는 굉장히 감동하시면서도 동시에 ‘꿈에서도 영화가 나온다’며 두려워하셨다”고 말했다.

예일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그는 당초 의사가 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학 시절 왕자웨이(王家衛), 구로사와 아키라, 테런스 맬릭의 예술 영화에 빠져서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 대학 졸업 직후 부모님과 함께 놀러 간 디즈니월드에서 그 사실을 용기 내어 말씀드렸다. 부모님의 만류에도 그는 수술용 메스 대신에 카메라를 잡았다. 그 뒤 단돈 20달러로 단편 영화와 실험 영화들을 찍기 시작했다.

 

리 아이삭 정(한국명 정이삭) 감독은

2006년에는 아내 발레리를 따라서 내전과 종족 학살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아프리카 르완다로 건너갔다. 결혼할 때 한 약속이었다. 예일대 재학 시절에 만난 아내는 르완다의 기독교 선교 단체에서 예술 치료사로 활동했다. 정 감독은 현지 학생 15명에게 영화 촬영을 가르쳤다. 르완다에서 3만달러(약 3300만원)의 저예산으로 11일 만에 비전문 배우들과 함께 장편 데뷔작 ‘문유랑가보’를 촬영했다. 시나리오도, 촬영도, 편집도, 연출도 혼자 떠맡아야 했던 사실상 1인 영화. 하지만 단돈 3만달러의 이 영화는 2007년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선정되며 정이삭 감독의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이번 ‘미나리’ 역시 순제작비 200만달러(약 22억원)의 저예산으로 촬영했다. 최근 한국 상업 영화의 평균 순제작비(76.5억원·2019년 영진위 자료)에도 크게 못 미친다. 배우 윤여정이 “200억원으로 잘못 알아듣고 출연했다”고 푸념했을 정도다.

정 감독은 데뷔작 이후에도 장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3편을 연출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영화 인생이 탄탄대로만은 아니었다. 그는 최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미나리’를 만들기 전에 ‘감독을 그만둘 생각도 했다’고 고백했다. 정 감독은 “마흔이 되면서 현실적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모든 걸 대본에 쏟아 넣은 작품”이 ‘미나리’였다. 정 감독은 얼마 전 봉준호 감독과의 영상 대담에서도 이렇게 고백했다. “내 딸이 이제 일곱 살이다. 영화에서 아버지가 농장을 가꾸면서 자신의 꿈을 추구하는 것처럼, 나 역시 수년 동안 무책임하게 영화라는 꿈만 바라보고 산 것 같았다. 내 딸을 통해서 부모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그에게 ‘미나리’는 영화의 꿈을 잃지 않도록 해준 동아줄이자, 세대를 뛰어넘어 가족을 든든하게 묶어준 끈이었던 셈이다.

 

김성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