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세에 4시간 적벽가 완창… “인자 소리 맛 좀 알겄네”
제27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자 - 송순섭 명창
입력 2020.10.15 03:05
제27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자로 선정된 송순섭(84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 보유자)명창이 지난 7일 전남 순천 '송순섭 판소리 보존회'에서 적벽가를 부르고 있다. 뒤로 보이는 열두 폭 병풍은 평소 시, 서화를 귀히 여기는 송 명창이 그 중에서도 애지중지하는 아천 김영철 화백의 '사슴도'. 30년 동안 송 명창의 곁을 지켰다는 아내는 "보셔요, 수컷은 한 마리밖에 없는데 나머지 대여섯 마리가 전부 암컷이요. 꼭 우리 선생님 같애. 근데 저 수컷 옆에 딱 붙어있는 한 마리 암사슴이 있잖어요? 바로 나 같애. 내가 꼭 지키고 있는 것처럼, 허허허!" 하며 웃었다. /오종찬 기자
벌교에서 고흥까지, 60년 전만 해도 머나먼 길이었다. 아이를 낳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아내를 살리려 이 악물고 달렸지만, 허사였다. 안숙선 명창의 사촌언니로 알아주는 소리꾼이던 여인을 잃었다며 사람들은 그를 원망했다. 아내의 위패 앞에서 그는 “뼈에다 맹세를 새겼다”. ‘내 기어코 명창 반열에 올라 당신한테 부끄럽지 않은 소리꾼이 되리다!’
◇정통 동편제 소리의 대가
전남 순천 산어귀에서 물소리, 꽃향기, 흙냄새를 벗 삼아 후학을 양성 중인 송순섭(84) 명창은 기운이 펄펄 넘쳤다. 매해 방일영국악상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올해도 나는 아닌가’ 쓰린 속을 달랬다는 그는 수상 소식에 “이 상을 못 타고 죽었으면 천추의 한으로 남았을 것”이라며 30년 동안 곁에 있어준 지금의 아내 손을 꼭 잡았다.
수많은 소리꾼이 명멸하는 판소리계에서 그는 드물게 동편제 ‘적벽가’를 전승했다. 부드럽고 기교 넘치는 서편제와 달리 동편제는 진중하고 웅장하다. 78세에 장장 네 시간짜리 적벽가를 완창했다. 장쾌한 소리로 무대를 휘어잡으며 건곤일척의 전쟁 장면을 실감 나게 소화한다.
지난 7일 전남 순천 ‘송순섭 판소리 보존회’에서 송순섭 명창이 시원한 발림(소리할 때 손짓·몸짓으로 나타내는 동작)을 선보이며 ‘적벽가’를 부르고 있다. /오종찬 기자
집안 형님이 모셔온 북 치는 이가 장단을 맞추며 흥얼거리는 소리에 얼이 빠졌다. 해 질 녘까지 흥부가를 흉내 내 부르며 소리에 눈떴다. 스물한 살에 광주로 가서 공대일 명창에게 ‘흥부가’, 김준섭 명창에게 ‘심청가’ ‘수궁가’를 배웠다. 어느 날 박봉술 명창의 ‘흥부가’ 음반을 듣고 혼이 나갔다. 그 길로 보따리를 싸 선생이 있는 부산으로 갔다. 7년간 ‘적벽가’ ‘수궁가’ ‘흥부가’를 배웠다. 동편제 거장 송만갑의 정통 소리 계보가 스승 박봉술을 통해 그에게로 이어졌다.
사는 건 고달팠다. 경상도는 ‘국악 불모지’. 소리를 청하는 이가 없어서 먹고살려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옛 부산상고 자리에 리어카를 놓고 호떡과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돈 벌려고 약장사까지 따라다닌 그를 챙겨준 은인이 방일영 전 조선일보 고문이다. 그 와중에도 ‘열사 유관순’ ‘흑의장군 정발’ 등 판소리 창작극 10여편을 무대에 올려 공전의 히트를 쳤다.
‘비가비 광대(양반 출신 소리꾼)’라며 냉대를 받았다. 득음은 요원했다. 어느 날 집에서 키우던 진돗개가 담에 두 발을 걸치고 컹컹 짖는 걸 보고 속 깊은 데서 우러나는 소리에 눈앞이 번쩍였다. “옳거니!” 그 소리를 닮으려 애쓰며 연습한 덕에 고난도인 적벽가의 새타령 대목도 술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는 ‘늦게 터진 소리꾼’이었다. 전주대사습 판소리 명창부 장원을 쉰여덟에 했다. 1978년 장려상을 받은 뒤 1등을 하기까지 16년 걸렸다.
◇"무대에서 소리를 하다 죽으련다"
2000년 겨울 갑자기 오른쪽 손과 발이 뻣뻣해졌다. 풍이었다. 다들 끝났다고 했을 때 꿈에 그리던 인간문화재 심의를 준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성치 않은 몸으로 소리를 한다는 건 모험이었다. “소리꾼은 무대에서 죽는 게 운명이고 최고의 영광이여. 나는 무대에서 소리를 하다 죽으련다.” 죽을 힘을 다한 끝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 보유자가 됐다.
소리꾼 최초로 ‘삼국지’ 적벽대전의 실제 무대에 올라 적벽가를 부른 날을 그는 잊지 못한다. 2006년 중국 남병산에서 제갈량이 동남풍 비는 대목을 시원스럽게 뽑아냈다. “참말로 내가 적벽에 왔구나 감격했다”는 그는 “근디 말여, 인자 소리 맛 좀 알고 할라고 헌께 갈 때가 되었네” 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도 북 장단 한 번이면 선 자리에서 한 대목씩 뚝딱 부르는 그는 “소리를 하며 평생 살았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했다. “용기를 갖고 꾸준히 해나가면 못 이룰 게 없어. 풍 맞은 몸으로도 완창한 내가 산증인이지.” 여든이 넘었어도 형형한 눈빛은 그대로인 소리꾼의 인생 한 대목이 휘모리장단처럼 빠르게 무대를 휘감았다.
제27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자로 선정된 송순섭(84) 명창이 지난 7일 전남 순천 '송순섭 판소리 보존회'에서 적벽가를 부르고 있다. 송 명창은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 보유자다. / 오종찬 기자
김경은 기자 편집국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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