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치병 고치는 유전자 가위, 이 손 다 거친다
[노벨상 꿈꾸는 젊은 과학자] [2] 김형범 연세대 교수
입력 2020.10.15 04:10
어릴 때 몸이 약해 의사를 꿈꿨다. 의사 선생님이 병을 고쳐주는 게 마냥 신기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땐 과학이 좋았다. 결국 의대에 진학했다. “의대 가면 의사도 과학자도 모두 할 수 있다”는 고등학교 한 해 선배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산업2/ 2020년 10월 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에비슨의 생명연구센터에서 김형범 의대 교수가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 장련성 기자
김형범(45) 연세대 의대 교수 얘기다. 그는 우리나라 의대 졸업생의 1%에 불과한 의과학자다. 의사 면허를 가졌지만, 메스를 잡지 않고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연세대 에비슨 의생명 연구센터에서 실험하고 연구만 한다. 김 교수의 의대 동기생 200여 명 중 병원이 아닌 기초과학 연구를 선택한 이는 단 4명이었다. 20년 지난 지금은 김 교수만 남았고, 그는 유전자를 교정하는 ‘유전자 가위’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 과학자가 됐다. 유전자 가위 분야의 대가인 김진수 전 서울대 교수는 “김형범 교수는 유전자 가위와 AI(인공지능)를 접목해 새로운 분야를 연 선구자적인 일을 해냈다”라고 말했다.
◇유전자 가위의 효율 예측 AI 개발
유전자 가위는 DNA(유전물질)에서 문제가 있는 부위만 잘라 유전 질환을 치료할 획기적 기술이다. 의학뿐 아니라 병충해 예방 식물 등 농업·축산업에도 쓰일 수 있다. 올해 노벨화학상을 받은 분야다. 관건은 유전자 가위로 원하는 부위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정확하게 자르느냐다. 올해 노벨화학상 수상자(제니퍼 다우드나 교수·에마뉘엘 샤르팡티에 소장)가 유전자 가위를 개발했다면 김 교수는 이를 효율적으로 안전하게 잘 쓸 방법을 개발해 유전자 가위 연구와 응용 분야를 넓혔다. 노벨상 수상자가 발명한 칼을 어떻게 잘 만들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를 김 교수가 연구하는 셈이다. 그동안 최초 발견·발명한 과학자뿐만 아니라 이를 여러 분야에 응용한 성과를 인정받은 과학자도 노벨상을 받은 사례는 여러 번 있었다.
산업2/ 2020년 10월 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에비슨의 생명연구센터에서 김형범 의대 교수가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 장련성 기자
김 교수는 2016년 세계 최초로 유전자 가위가 DNA에서 원하는 부위를 제대로 잘랐는지를 대량으로 측정하는 실험 방법을 개발했다. 이전까지는 유전자 가위 1만개의 교정 결과를 측정하려면, 연구자 한 명이 7년 8개월 동안 2억원을 들여야 했다. 김 교수의 방법으로 실험하면 4주 동안 500만원이면 된다. 유전자 가위 교정 결과 측정 시간을 100분의 1, 여기에 드는 비용을 40분의 1로 줄인 것이다. 김 교수는 “가내수공업 수준이던 생산 방식을 자동화된 공장으로 바꾼 것과 같다”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2018년 윤성로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와 함께 실험 없이도 유전자 가위의 교정 결과를 예측하는 AI 모델도 개발했다. AI를 유전자 가위에 접목한 건 세계 최초다. 유전자 가위는 치료 성공률이 0~99%로 천차만별이다.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효율이 높은 유전자 가위를 써야 한다. 김 교수는 대량으로 측정한 유전자 가위 데이터를 AI에 학습시켜 치료 성공률을 맞히는 정확도를 90% 이상으로 올렸다. MIT 등에서도 개발에 나섰지만 김 교수가 만든 모델을 따라가지 못했다. 김 교수는 “유전자 가위를 연구하는 세계적인 연구그룹 대부분이 이 모델을 사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 선택
김 교수가 과학자의 길을 결심한 건 의대 본과 4학년 때다. 병원 실습을 돌면서 치료가 안 되는 질병이 많다는 것을 직접 보며 알게 된 게 계기였다.
“의학이라는 게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환자 치료도 중요하지만, 아무도 못 고치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김형범 연세대 의대 교수가 8일 서울 연대 에비슨의생명연구센터에서 DNA 모형을 들고 있다. 의사 출신인 김 교수는 유전자 가위의 효율을 예측하는 인공지능(AI) 모델을 만들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는 “환자를 딱 한 명이라도 낫게 하는 연구를 한다면 과학자로서 임무를 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련성 기자
김 교수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했다. 의대를 나와 연세대 나노과학 기술 협동 과정에서 박사를 했다. 그는 “처음에는 친구와 선후배 모두 의사 길을 가는데 나만 다른 길을 가니 불안하긴 했다”고 말했다. 박사과정 때 실험실에서 몇 달 동안 원하던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는 다 때려치우고 병원으로 돌아갈까 고민한 적도 많았다.
그런데도 그를 실험실에 붙잡아 둔 건 연구에 대한 보람 때문이었다. 김 교수는 “내 연구가 유전 질환을 치료하는 데 실마리가 된 것에 뿌듯하다”며 “의사로서 삶을 살지 않은 것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의대에 입학하는 똑똑한 친구들이 연구를 해주면 의과학은 훨씬 더 발전할 것”이라고 했다.
김형범(45) 연세대 의대 교수는
그는 병원은 떠났지만, 여전히 환자들을 생각하고 있다. 김 교수 연구의 최종 목표가 아픈 이들의 병을 낫게 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는 ‘각자 자리에서 맡은 바 열심히 하는 것이 애국애족’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제 연구를 통해 딱 한 명이라도 아팠던 사람이 나을 수 있다면 과학자로서 임무를 다 한 게 아닐까요.”
김 교수는 “이번에 유전자 가위 분야가 노벨상을 받았으니 앞으로는 세상에 파급력 있는 새로운 생명공학 분야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유지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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