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박종인의 땅의 歷史] 복원된 궁궐 속에 온갖 시대가 뒤엉켜 흐른다

최만섭 2022. 8. 24. 05:25

[박종인의 땅의 歷史] 복원된 궁궐 속에 온갖 시대가 뒤엉켜 흐른다

312. 광화문광장 개장에 맞춰 점검해보는 궁궐 복원

입력 2022.08.24 03:00
 
 
 
 
 
경복궁 근정전과 월대. 임진왜란 이래 폐허였던 경복궁은 1865년부터 3년 동안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됐다가 식민시대에 만신창이가 돼 현재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복원 기준 시점은 중건이 완료된 1888년이다. 역사적 기념물 복원에 관한 ‘베네치아헌장’(1964)은 ‘추측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복원은 멈춰야 한다’고 선언했다. ‘대한민국 문화유산헌장’(2020)도 ‘문화유산의 원래 모습과 가치를 온전하게 지킨다’고 규정하고 있다. 경복궁 복원에는 숱한 추측과 원칙 파괴가 개입됐다./박종인 기자

 

 

* 유튜브 https://youtu.be/VvPQovtE5Gc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울 광화문광장이 화려하게 개장했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한양을 수도로 정한 이래 630년 만에 궁궐 앞 공간 용도가 바뀌었다. 허허벌판이던 옛 육조거리가 시민이 머물며 여가를 즐기는 광장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지난 22일 조선 법궁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에 있던 월대(月臺) 시굴작업이 개시되면서 경복궁을 포함한 서울 사대문 안쪽 역사 복원작업이 마무리에 들어간다. 미흡한 점은 없는가. 21세기를 사는 대한민국 시민의 삶과 20세기까지 이 공간을 메꿨던 땅의 역사 사이에 충돌은 없는가 살펴본다.

베네치아 헌장과 문화유산 헌장

‘베네치아 헌장(1964)’은 ‘기념물과 사적지의 보존·복원을 위한 국제헌장’이다. 세대에 걸쳐 내려온 역사적 기념물을 보존해 후대에 물려줄 인류의 의무를 규정했다. 이 헌장은 9조에서 이렇게 규정했다. ‘추측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복원은 멈춰야 한다(It must stop at the point where conjecture begins).’

대한민국 또한 법령과 선언으로 베네치아 헌장의 정신을 따르고 있다. 2020년에 문화재청이 만든 ‘문화유산 헌장’은 그 첫 문구가 이렇다. ‘문화유산의 원래 모습과 가치를 온전하게 지킨다.’ 그리고 베네치아 헌장과 동일하게 ‘다음 세대에 문화유산을 더욱 값지게 전해 주고자 함’이 목적이다. 문화재 복원과 보존에 대해 이 두 헌장만큼 명쾌한 기준은 없다. 이 기준에 따라 현재 진행 중인 복원작업을 살펴보자.

2022년 여름 광화문광장.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재탄생했지만 역사성은 무시됐다. /박종인 기자

역사를 덮어버린 광화문광장

‘법궁 방향을 다들 임좌(북서쪽을 등짐. 즉 남동향)라고 하였다. 그런데 대원군 지시로 지관 안명호가 방향을 쟀는데 교태전 이하 모든 건물 옛 주춧돌 및 광화문은 모두 자좌(정남향)였으며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국역 ‘경복궁영건일기’1, 서울역사편찬원, 2019, pp. 83~85)

경복궁을 중건할 때 흥선대원군이 고용했던 안명호라는 지관은 지엄하신 대원군 분부로 옛 주춧돌을 기준으로 방위를 측정해 이렇게 보고했다. (제왕이 마주해야 하는) 정남향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껏 궁궐이 임좌라 한 것은 임진왜란 후 생긴 착각”이라고 확언했다.

그런데 복원과정에서 경복궁 중심 건물들은 단 하나 예외 없이 정남향도 아니고 남동향 임좌도 아닌 남서향임이 밝혀졌다. 심지어 광화문도 남서향이다. 측정 오류인지 혹은 제왕적 권력을 꿈꾸는 대원군 앞에서 알아서 거짓말을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여하튼 궁궐 중건은 ‘정남향이라는 믿음’하에 진행됐고 완료됐다. 그런데 궁궐 중심을 따라 그 앞에 관아 거리를 지으려 하니 방향이 점점 엇나가는 것이다. 하여 육조거리 중간쯤에 방향을 남쪽으로 꺾고 나서야 이 거리가 종로거리와 만날 때에는 정남향으로 바로잡혔다. 육조거리, 그러니까 세종대로는 이렇게 애당초 휘어져 건설됐다.

식민시대 경복궁을 갈아엎고 총독부가 자기네 청사를 궐 안에 만들 때, 총독부 건축과장 이와이 조자부로(岩井長三郞)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도로가 활처럼 굽어 있다. 이건 어떤 미신이 있지 않았을까.”(‘조선’ 1926년 4월호 ‘총독부신청사 계획 및 실시에 대해’) 경복궁건축출장소장 후지오카 주이치(富士岡重一)는 이렇게 말했다. “광화문통이 히라가나 ‘く’(쿠) 자처럼 굽어져 있다.”(‘조선과건축’ 1926년 5월호, ‘신청사의 설계개요’: 이상 역사연구가 이순우,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 다음카페)

개장한 광화문광장은 어떤가. 총독부가 만든 도로보다 더 정확하게 정남향 직선광장이다. 남서~정남으로 휘었던 옛 도로 형태는 완전히 파괴되고 명쾌하게 식민시대로 회귀했다. 시민 휴식 공간이 된 것은 분명하나 역사적 복원은 아니라는 뜻이다.

1907년(추정) 육조거리 실측도면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 광화문~육조거리 축이 휘어 있다. 총독부가 왜곡한 축이 아닌, 본래의 축이다./국가기록원

경복궁 어떻게 복원 중?

경복궁 복원 사업은 1984년 기본 방침이 나온 이래 2045년까지 61년을 예정한 대역사(大役事)다. 복원 기준 연대는 1888년이다. 흥선대원군이 시작한 경복궁 중건 공사가 완료된 해다.(문화재청, ‘1994년 경복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보고서’)

 

복원을 위한 자료는 옛 그림과 ‘북궐도형’(1907), ‘경복궁영건일기’(1865~1868), ‘궁궐지(1901~1907)’, ‘조선고적도보’(1915~1935) 및 총독부 유리건판 사진 따위가 있다. 숫자로는 자료가 풍부해 보이지만 이들 자료는 ‘평면도’가 대부분이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과 유리건판 사진에 나오는 건물들을 제외하고는 입체적 형태나 내부 구조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복원 계획 보고서에는 ‘초석은 장초석으로 만들고 하부는 통행이 가능하도록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문화재청, ‘경복궁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정비 계획보고서’, ‘건청궁 장안당’, p162)라는 식으로 ‘추정 복원’이 수없이 언급된다.

이는 ‘추측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복원을 멈춰야 하는’ 베네치아 헌장은 물론 ‘원래 모습과 가치를 온전하게 지킨다’는 대한민국 문화유산 헌장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작업이다. 당시 자료 미비 탓에 경복궁 복원은 이런 본질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추정에 의존하더라도 문화재청이 설정한 기준을 엄격하게 지키면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그러지 못한 부분이 곳곳에 있다.

경회루는 동서남북에 서 있던 담장이 식민지 때 철거됐다. 2004년 문화재청은 이 중 동쪽과 북쪽 담장을 복원했다. 남쪽과 서쪽 담장은 복원하지 않았다. 사진까지 남아 있어서 충분히 원형 복원이 가능했지만, ‘관람객 관람 편의’가 이유였다. 흥례문 구역 서쪽 구석에는 내사복시(內司僕寺)가 있었다. 궁중 말을 관리하는 마구간과 관리소다. 해방 직후 사진에는 이 자리에 총독부 부속 건물이 서 있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위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박물관을 해체하고 내사복시를 복원하겠다는 계획은 없다. 경복궁 동쪽 건춘문 옆에는 1915년 총독부 ‘시정(始政)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때 만든 총독부박물관 부속 건물이 남아 있다. 지금 문화재청 경복궁 관리소로 사용 중이다.

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철거와 복원을 할 것인가. 혹은 현대 대한민국의 편의를 위해 현상태를 유지할 것인가. 1907년 통감부가 주도해 세운 창경궁 식물원은 올해 복원했다. 덕수궁 대한문 앞 월대는 ‘보행자 통행’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옛 사진에 나온 규모보다 축소해서 복원 중이다. 그래서 ‘복원’이 아니라 ‘재현’이라고 명명했다. 기준이 무엇인가.

경복궁 건춘문 북쪽에 있는 경복궁관리소. 1915년 총독부 ‘시정(始政)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때 만든 총독부박물관 부속 건물이다./박종인 기자
1550년에 그린 ‘비변사계회도’(부분). 근정전~근정문~흥례문~광화문~육조거리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광화문 앞에 월대(月臺)가 보이지 않는다. 실록에는 1431년 3월 29일 세종이 “농사철(춘분~추분)을 맞아 월대를 만들지 말라”고 명했고, 19일 뒤 광화문이 완공됐다고 적혀 있다. 문화재청은 “경복궁 복원 기준 시점인 1888년에는 월대가 존재했으므로 이전 시대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복원할 예정”이라고 했다. /서울역사박물관

광장과 궁궐 사이, 월대

8월 22일 발굴 조사에 들어간 광화문 월대는 문제가 종합적이다. 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월대를 만들지 말라”고 명령했다.(1431년 음력 3월 29일 ‘세종실록’) 119년 뒤인 1550년 제작된 ‘비변사계회도(備邊司契會圖)’에는 경복궁과 육조거리가 그려져 있는데, 아무리 봐도 광화문 앞 월대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42년 뒤 임진왜란이 터졌다. 기록만으로 보면 월대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역사상 ‘광화문 월대’가 처음 등장한 날은 정확하게 1866년 음력 3월 3일, 월대가 완공된 날이다.(국역 ‘경복궁영건일기’1, p404)

2011년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경복궁 발굴 조사 보고서’에서 “향후 선대 유구에 대한 추가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 추가 조사가 이제 시작됐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발굴조사 결과 고종 시대 이전의 월대 유적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월대 복원 공사를 실시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유는 ‘고종 때인 1888년이 복원 기준 연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궁박물관 자리에 있던 내사복시와 경복궁 관리소로 사용 중인 총독부박물관 부속 건물과 미완의 경회루 담장과 이 월대는 뭐가 다른가. 이미 광화문 앞 도로는 Y자 형으로 변형이 완료됐고 월대 주변에는 각종 공사 장비와 바닥에 깔 박석 더미가 쌓여 있다.

‘추정 복원 금지’와 ‘원래 모습과 가치’라는 기준으로 경복궁을 짚어보았다.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역사가 됩니다. 땅에는 흔적이 남습니다. 그게 역삽니다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