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최만섭 2022. 8. 23. 05:25

[고전 이야기] 평범한 사람 내면에 있는 악한 본성… 나치 부역자 재판 과정으로 알렸죠

입력 : 2022.08.23 03:30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초판. /위키피디아

"검찰에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요. 이후 전 세계는 6년여 동안 전쟁이라는 끔찍한 재난을 겪어야만 했어요. 나치의 악독함은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유대인 학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어요. 나치는 무려 600만명 이상의 무고한 생명을 학살했어요.

독일 철학자 해나 아렌트(1906~1975)가 1963년 출간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전범(戰犯)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 과정을 기록한 책으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널리 알린 작품이에요. 아이히만은 1942년부터 유대인을 학살하는 실무 총책임자로 활동했는데, 전쟁이 끝나고 중동을 전전하다가 1958년 아르헨티나로 숨어들었어요. 하지만 1960년 5월, 나치 전범을 추적하는 한 단체에 의해 신분이 탄로 났고 곧 체포됐어요.

곧장 이스라엘로 이송된 아이히만은 예루살렘 법정에 서게 돼요. 아렌트는 미국 잡지 '뉴요커'의 특파원 자격으로 이 재판을 참관하죠.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맡은 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해요. 상부의 명령을 성실하게 따른 것도 죄냐는 것이죠.

유대인 학살 당시 나치는 자기들만의 상투어(늘 써서 버릇이 되다시피 한 말)를 만들어 사용했는데요. 이들은 추방을 '첫 번째 해결책'으로 불렀고, 수용은 '두 번째 해결책'으로, 학살은 '최종 해결책'으로 불렀어요.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주장하는 내내 이 상투어를 사용해 말했고, 상투어를 쓰지 않고서는 말을 하기 어려워했어요.

아렌트는 이 대목을 강하게 비판해요. 나치가 만든 상투어가 현실을 호도하고 자기가 하는 일과 현실에 눈감게 했다는 거예요. 악의 평범성이라고 하면 보통 '모든 인간의 내면에 아이히만과 같은 악마적 본성이 있다'는 개념을 떠올려요. 하지만 아렌트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기를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는 상황, 역지사지(易地思之)하지 않는 것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정의해요.

아렌트가 보기에 아이히만은 책임을 면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 충성심으로 뭉쳐진, 스스로 사유할 수 없는 한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어요. 아이히만의 이런 모습이 악의 평범성을 잘 보여준다는 거지요.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종종 무시하는 우리도 실은 악의 평범성을 내포하고 있는 사람들인 셈이에요.

이 책은 '악의 문제에 대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여'를 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