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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주기 포퓰리즘의 끝… 64% 인플레 덮쳤다

최만섭 2022. 8. 6. 16:52

퍼주기 포퓰리즘의 끝… 64% 인플레 덮쳤다

재정 거덜난 아르헨티나 만성적 高물가에 신음

입력 2022.08.06 03:00
 
 
 
 
 
지난달 29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점포 앞에 '오늘 사세요, 내일보다 쌉니다'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는 모습. 아르헨티나의 지난달 물가상승률은 전년 대비 64%를 기록했다. 정부의 반복되는 '퍼주기' 정책과 무리한 가격 통제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로이터 뉴스1

“아르헨티나 국민은 월급이 들어오면 마트부터 달려갑니다. 한 달 치 생필품을 한꺼번에 사려고요. 모두 ‘오늘이 제일 싼 날’이라는 걸 알거든요.”

지난달부터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강정석씨는 5일 통화에서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니 월급날이면 생수, 화장지 등 생필품 한 달 치를 한꺼번에 구입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 달 전에 2000페소(약 2만원)였던 라면 다섯 봉지 1팩이 지금은 2500페소로 올랐다고 했다.

세계 경제가 인플레이션 불길에 휩싸여 있지만, 아르헨티나의 물가 급등은 차원이 다르다. 물가상승률이 지난해 6월 50%(전년 대비)를 넘어선 후 지난 6월엔 64%까지 치솟았다. G20(주요 20국) 가운데 경기 부양을 하겠다며 기준금리를 내리며 일부러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는 튀르키예(터키)를 빼면 가장 높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며 기준 금리를 지난달 8%포인트나 인상하면서 연 60%까지 끌어올렸다. 지난 4일에는 임명된 지 24일 만에 경제장관이 경질되면서 한 달 새 경제장관의 얼굴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아르헨티나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퍼주기’로 인기를 유지하려는 정부, 돈을 찍어대는 중앙은행, 반시장적 정책 남발 등이 아르헨티나 경제를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망가뜨리고 있는 중이다.

시민들 “못살겠다, 보조금 더 올려라” -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지난 2일 열린 반정부 시위에 참석한 한 여성이 미국 달러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부통령 등 정부 관계자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을 두르고 행진하고 있다. 반복되는 정부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재정 적자가 커지고 있지만 시위에 참석한 시민들은 살인적 인플레이션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며 정부 보조금 인상 등 더 많은‘퍼주기’를 요구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432개 품목 가격 상한제 등 반시장 정책 실패

지난해 10월 아르헨티나 정부는 전방위적인 가격 동결 조치를 발표했다. 치즈, 고양이 사료, 면도 크림 등 1432개 품목에 가격 상한을 설정했다. 물가가 뛰면서 총선의 전초전 격인 예비 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하자 극약 처방에 나섰다. 반시장적인 가격 통제는 실패로 끝났다. 주춤하는 듯하던 물가는 더 상승했다. 아르헨티나 주재원인 하영택씨는 “업체들이 정부 눈치를 보면서도 가격을 계속 올리기 때문에 정부 조치가 유지되지 못했다”고 했다.

 

2019년 집권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 정부는 ‘페로니즘’의 계승자를 자처한다. 후안 페론 전 대통령의 이름을 딴 페로니즘은 광범위한 무상 복지와 자국 우선주의 등을 아우르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정치·경제 체제다.

그래픽=이민경

페르난데스 정권 또한 각종 보조금과 복지를 늘리는 한편 세금을 낮춰 왔다. 반복된 세금 인하로 아르헨티나는 소득세를 내는 사람이 근로자의 15%뿐이다. 세수는 적은데 코로나 대응 등으로 지출이 늘면서 아르헨티나의 재정 적자는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3%, 올해는 4.5%가 예상될 정도로 불어나고 있다. 구멍 난 재정은 중앙은행의 ‘돈 찍기’로 때우는 중이다. 재정 적자를 막으려 찍어낸 돈이 GDP의 3.7%에 달한다. GDP가 2000조원 정도인 한국이라면, 한국은행이 약 74조원을 찍어 재정 적자를 메운 셈이 된다.

◇한 해 걸러 선거… 포퓰리즘 정책에 망가진 경제

지나치게 잦은 선거도 인플레이션 유발 요인으로 꼽힌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선거는 4년, 의원 선거는 2년마다 치러진다. 정치권은 한 해 걸러 한 번씩 반복되는 선거를 전후해 포퓰리즘적 ‘돈 풀기’ 정책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만 세 차례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한 아르헨티나는 올해 초 국제통화기금(IMF)과 부채 조정안에 합의하면서 긴축을 통한 재정 적자 개선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 약속을 믿는 사람은 드물다. 아르헨티나는 2018년 IMF 구제금융을 받을 때도 비슷한 합의를 했지만, 표를 노린 정치권의 포퓰리즘 공약이 선거 때마다 반복되며 약속이 무시됐기 때문이다. 페데리코 스투르제네거 전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는 언론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 정부의 정책은 경제 원칙과는 무관하다. 전부 선거를 위한 정치적 조치일 뿐”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경제부 김신영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