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으로 사망한 이상희 하사의 어머니 심윤옥 씨(58)가 5일 오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역을 찾아 아들의 묘비를 어루만지고 있다. 대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한창때 피어 보지도 못하고 죽었어. 얼마나 억울해요, 얼마나….”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오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고 이상준 중사의 어머니 김이영 씨(66)가 거센 비바람을 뚫고 ‘천안함 46용사’ 묘역에 도착했다. 아들 묘역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 씨는 흠뻑 젖은 옷자락을 아랑곳하지 않고 묘비를 정성스럽게 어루만졌다. 이어 주변 잡초를 하나씩 뽑았고 묘비 옆 꽃병의 시든 꽃은 활짝 핀 분홍 카네이션으로 바꿨다.
한참 묘역을 정리하던 김 씨가 문득 고개를 들며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천안함 장병들에 대한 대우가 너무 좋지 않았잖아요. 제가 엄마로서 마음이 편할 수 없더라고요. 바뀐 정부에서는 우리 아들이 응당한 대우를 받았으면 합니다.”
이날 고 장진선 중사의 모친 박모 씨(57)도 편치 않은 몸을 이끌고 추모식에 참석했다. 2년 전 암 진단을 받은 박 씨는 건강 악화로 지난해 추모식은 불참했다. “오랜만에 아들을 만나 반갑다”는 박 씨는 환한 미소를 띠며 아들의 묘역 주변을 정리했다.
천안함 용사 유족 80여 명은 이날 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역을 찾아 추모제를 지내고 묘역을 정리했다. 유족들과 생존 장병들이 나흘간 마련한 추모 행사의 첫 일정이다. 유족들은 6일 묘역을 다시 찾아 합동 참배를 하고, 7일에는 천안함이 북한 공격으로 침몰한 서해 백령도 인근 해상을 찾아 바다에 헌화할 계획이다.
최원일 “천안함 장병이라는게 자랑스러운 나라 만들어주길”
‘천안함 46용사’ 추모행사
“12년 지난 지금도 아들 빈자리 허전”… 내일 3년만에 백령도 찾아가 헌화 “우리 아들 몫까지 잘 살아달라”… 유족-생존장병들 서로 챙기며 교류 침몰원인 ‘음모론’ 등 마음고생 심해 “새 정부선 장병들 명예회복해주길”
5일 오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은 고 박정훈 병장의 유족들이 묘비를 어루만지며 박 병장을 추모하고 있다. 현충일을 하루 앞둔 이날 ‘천안함 46용사’ 묘역을 찾은 천안함 유족 80여 명은 묘역 입구에 놓인 제단에서 추모제를 지냈다. 유족들은 묘역 주변을 정리하고 헌화하며 용사들을 기렸다. 대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천안함 유족과 생존 장병들이 함께 현충일 전후에 백령도를 방문하는 건 2019년 이후 3년 만이다. 천안함이 침몰한 2010년 3월 26일 이후 매년 현충일마다 국립대전현충원과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함께 추모행사를 진행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2020년과 지난해엔 대전현충원에서 간단한 추모식만 지냈다.
천안함 고 이재민 하사의 아버지 이기섭 씨(62)는 “12년이 지난 지금도 아들의 빈자리가 여전히 허전하다”면서 “아들이 전역을 50일밖에 안 남겨둔 상태에서 사고를 당했다. 올해는 백령도에 가서 아들을 꼭 만날 것”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유족들은 이날 추모식 후 대전시내에서 생존 장병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생존 장병들이 유족들을 위해 ‘아들의 빈자리’를 채워준 것. 유족과 생존 장병들은 서로 경조사를 챙기며 평소에도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피격 당시 이병이었던 이모 씨(32)도 천안함 폭침 당시 순직한 동기의 부모님과 12년째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천안함 폭침 당시 군대에 갓 입대한 스무 살이었던 이 씨는 동기의 죽음 이후 악몽을 꾸며 괴로운 날을 보냈다.
이 씨에게 힘이 되어준 건 “우리 아들 몫까지 대신 잘 살아달라”는 순직 동기 어머니의 당부였다. 동기의 어머니는 이 씨의 대학 학자금까지 지원해줬고, 이 씨의 결혼식에도 참석해 “우리 아들 대신 잘 살아줘서 고맙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 씨는 이날 동아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아들처럼 챙겨주신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에서 전사한 동기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돌이켰다.
○ “천안함 장병이 자랑스러운 나라로”
이날 추모식에 참석한 천안함 유족과 생존 장병들은 “지난 12년간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입을 모았다. 2010년 폭침 사건 이후 민관 합동조사단에 이어 해외 전문가들로 구성된 다국적 조사단도 북한 어뢰 공격에 의한 격침이라고 발표했지만, 이후에도 침몰 원인을 둘러싼 ‘음모론’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모적인 논쟁이 이어지면서 ‘천안함 46용사’와 생존 장병의 명예 회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극적으로 생존한 이 씨는 남은 군 생활 기간에 다친 허리와 정신적 충격을 치료하러 병원에 다녀야 했다. 이 씨는 “주변 눈치가 보여 병원을 가는 것도 쉽지 않았고, 전역 후에는 전액 자비로 진료를 받았다”고 했다. 또 “정부와 정치인 모두 선거 때만 천안함을 언급하고 진심으로 유족과 생존 장병들을 생각해주는 것 같지 않았다”고 했다.
이날 대전현충원에서 만난 천안함 유족과 생존 장병들은 “특히 지난 정부에서 소외감이 컸다”고 했다. 고 이상희 하사의 부친인 이성우 천안함 유족회장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기 중 마지막 서해수호의 날(3월 25일)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언급하며 “군 최고 통수권자로서 죽은 장병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며 “지난 정부와 달리 이번 정부에선 천안함 장병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줬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최원일 전 천안함장(예비역 해군 대령)도 동아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천안함에 대한 왜곡된 시선으로 인해 유족들 중에는 본인 아들이 천안함을 탔던 장병이라고 떳떳하게 말 못 하고 사는 분들이 많다”며 “새 정부는 천안함을 탔던 장병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나라를 꼭 만들어줬으면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