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과학] 빠르게 걸을수록 노화를 늦출 수 있대요
텔로미어(Telomere)의 비밀
걸음걸이는 사람의 건강 상태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겉모습 중 하나예요. 영국 레스터대학교에서 진행한 연구에서 걸음걸이가 느리면 느릴수록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빠르게 걷는 사람은 느리게 걷는 사람에 비해 생물학적으로 16년 더 젊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빨리 걷는 사람일수록 '텔로미어'(Telomere) 길이가 길게 유지된다는 게 그 이유라는데요. 텔로미어는 무엇이고, 또 텔로미어 길이와 노화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걸까요.
텔로미어란 무엇일까
우리 몸의 기본 단위는 세포예요. 사람의 체세포는 46개 염색체(상염색체 44개+성염색체 2개)로 이뤄져 있어요. 부모에게서 23개씩 받죠. 염색체는 유전 정보인 DNA를 담고 있어요. DNA는 다시 아데닌(A)·구아닌(G)·시토신(C)·티민(T)이라는 네 염기로 구성됩니다.
텔로미어는 염색체 양쪽 끝 부분에 있는 DNA 염기서열을 말해요. 특정 염기서열(TTAGGG)이 반복해서 이어져 있죠. 사람의 경우 약 1000번 반복돼 있어요. 예를 들어 AATGCGGTAG라는 DNA에 텔로미어가 붙어 'AATGCGGTAG-TTAGGG-TTAGGG-TTAGGG-TTAGGG'식으로 이뤄졌다는 거예요.
텔로미어는 그리스어로 '끝'을 의미하는 텔로스(Telos)와 '부위'를 의미하는 메로스(Meros)의 합성어인데요. 마치 신발끈 끝에 있는 플라스틱 캡이 끈 끝이 해지는 것을 막는 것처럼, 염색체 끝에서 염색체가 손상되지 않도록 염기서열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요. 문제는 세포분열이 거듭되면 텔로미어의 길이가 점점 짧아지고 결국 닳아서 사라지는 시기가 온다는 거예요.
사람은 주기적으로 세포분열을 통해 생명을 유지해요.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세포가 분열하는 횟수는 50~60번 정도예요. 세포는 분열할 때마다 DNA를 복제하지만, 이 과정에서 텔로미어의 길이가 일정 수준 이하로 짧아지면, 세포는 분열을 멈추고 죽습니다. 즉 '세포분열→텔로미어 길이 짧아짐→일정 수준 이하로 짧아지면 세포분열 멈춤→세포 죽음'으로 이어지는 텔로미어 길이 단축 과정이 노화의 과정이자 수명을 결정하는 것이죠.
텔로미어의 길이는 생물종에 따라 다른데요. 사람 체세포의 텔로미어 길이는 보통 5~10킬로베이스(kb·1kb는 DNA 염기 1000개 길이)예요. 세포분열 때마다 50~ 200bp(1bp는 1염기 길이)만큼 짧아지다가 그 길이가 1~2kb 이하로 떨어지면 세포는 복제를 멈춥니다. 근육 세포에서 텔로미어의 길이가 짧아질수록 힘이 점점 약해지고, 피부세포에서는 탄력이 감소하게 됩니다.
걷기 속도 빠르면 생물학적 노화 과정 늦춰져
그렇다면 텔로미어가 닳는 걸 지연시킬 순 없을까요. 영국 레스터대의 연구팀은 우리의 걸음걸이가 텔로미어 길이를 길게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해요. 시속 약 6.4㎞ 이상으로 걸음을 빨리 걷는 게 노화를 늦추는 방법이라는데요. 평균 나이 56.5세의 영국인 40만5981명의 유전자와 신체 활동 관련 데이터를 분석해 얻어낸 결과예요.
연구팀은 그들의 걷기 속도, 신체활동량, 식이, 기저질환 등을 분석한 다음 이것이 텔로미어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조사했어요. 그 결과 운동 강도나 신체활동량과는 아무 상관 없고, 걷기 속도가 빠른 사람이 느린 사람(시속 약 4.8㎞ 미만)보다 텔로미어의 길이가 더 긴 것으로 나타났어요.
연구팀에 따르면 빠르게 걷는 사람이 천천히 걷는 사람에 비해 생물학적 나이를 16년 더 젊게 만들 수 있다고 해요. 생물학적 나이는 사람의 성장 발육 정도와 건강, 몸의 전반적인 기능 상태에 따라 결정되는 나이인데요. 60세 된 사람의 몸의 기능 상태가 40세와 같으면 그의 생물학적 나이는 40세인 거예요. 하루에 10분씩 빠르게 걷거나 정해진 시간 안에 걸음 수를 늘리는 게 노화를 막는 지름길이라네요. 이 연구 결과는 지난달 국제학술지 '커뮤니케이션스 바이올로지'에 발표됐습니다.
암세포는 텔로미어 길이 안 짧아져요
텔로미어 길이가 짧아지면 암세포도 죽게 되고 그러면 암에서 회복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암세포는 세포분열을 해도 텔로미어 길이가 짧아지지 않는답니다. 암세포에 있는 '텔로머라제(Telomerase)'라는 효소 때문인데요. 텔로머라제가 염색체 끝에 새로운 염기를 계속 덧붙이는 방식으로 텔로미어의 길이를 유지해 주거든요. 암세포가 죽지 않고 계속 증식할 수 있는 이유예요.
텔로머라제는 단백질과 RNA로 구성돼 있어요. 일반 세포(체세포)에서는 발현되지 않고 생식 세포나 줄기세포, 암세포에서만 활성화돼요. 암세포의 약 90%가 텔로머라제 활성도가 높아요. 이 활성도를 떨어뜨려 암세포의 죽음을 유도하려는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어요.
한편 과학계에서는 반대로 텔로머라제를 이용한 '회춘' 연구가 한창이에요. 체세포에 텔로머라제를 작동하게 해 텔로미어 길이가 짧아지는 것을 막으려는 거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상 세포가 암세포로 변할 수 있다고 해요. 만약 노화를 되살리는 '세포 역노화' 기술이 성공한다면, 수명 연장은 물론 노인성 질환 예방 치료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날 거예요. 불로장생의 꿈이 텔로머라제에 있는 셈입니다.
[텔로미어와 텔로머라제의 발견]
1978년 미국 캘리포니아대 엘리자베스 블랙번 교수는 염색체의 끝 부분에 특정 염기서열이 반복된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그것이 바로 텔로미어예요. 1980년엔 미국의 생화학자이자 유전학자인 잭 쇼스택과 공동으로 텔로미어의 역할이 DNA 보호라는 것을 밝혀냈죠. 블랙번은 또 1984년 당시 대학원생이던 캐럴 그라이더와 함께 텔로미어를 복제하는 효소인 텔로머라제를 발견했어요. 이 연구로 블랙번과 쇼스택, 그라이더는 200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