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대출 규제로 집값 잡겠다는 돈키호테적 발상
집 계약한 신혼부부입니다
대출 받을 수 없다는데 계약금 날려야 할까요?
다주택자, 1주택자 저격하더니
이제는 무주택자 차례입니까?
입력 2021.09.07 03:20
서울의 한 시중 은행 창구 모습./연합뉴스
경제 부처 공무원 A씨는 요즘 금융권의 거침없는 대출 축소를 보면 10여 년 전 일이 떠오른다고 했다. 좋은 기억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지금처럼 집값이 폭등해 종합부동산세다 투기 과열 지구 지정이다 하며 온갖 수단을 동원했는데 가격이 안 내려가 난리가 났다. 정권 말기에 대출 규제인 DTI(총부채상환비율)를 강화했더니 집값이 식을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청와대는 격노했다고 한다. A씨의 얘기다. “담당 공무원 문책까지 거론됐다고 들었습니다. 대출 조여서 집값을 잡을 수 있었건만 여태 뭐 했느냐면서요.” 문책까지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공무원들이 반성문을 써내야 했다. ‘진작 대출을 더 축소해 집값을 잡았어야 했음에도….’
이 과정을 청와대에서 본 사람이 당시 비서실장이던 문재인 대통령이다. 그의 머릿속엔 ‘대출을 억누르면 집값이 내려간다’는 단순한 믿음이 박힌 듯하다. 요즘 금융 당국을 통해 은행권에서 시행하는 거침없는 대출 조이기를 보면 그렇다. 재임 기간 내내 주택 관련 대출을 옥죄어온 정부는 이제 신용대출, 마이너스통장 등 전방위적으로 규제를 확대하고 있다.
코로나로 정부가 재난지원금까지 뿌리는 와중에 대출을 막는다니 타이밍이 뜬금없다. 절차도 기이하다. 취재해보면 은행이 금융 당국 주도 아래 일사불란하게 대출을 축소 중인 건 맞는다. 하지만 공식적인 보도자료 한번 나온 적이 없다. 가끔 두루뭉술한 해명 자료 정도를 뿌릴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일어나는 때려잡기식 대출 통제의 실체는 무엇이고 지휘부는 누구란 말인가. 당국자와 은행 여신 담당 입에서 ‘청와대’란 단어가 자꾸 들린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는데 무엇 하느냐고 청와대가 압박해서” “대출 동향은 청와대엔 이미 보고를 했는데”라는 식이다.
코로나 시국에 대통령이 무슨 은행 대출까지 챙기겠느냐고 여길 일은 아니다. 문 대통령은 한 해 전에도 대출을 줄여 집값을 잡으라고 직접 압박했다. 증거가 남아 있다. 지난해 금융위원회 국정감사 자료에 적힌 내용이다. “신용대출로 부동산 대책 효과를 하락시키는 행위에 대해 조치를 하라고 대통령이 지시했다.” 주문이 묘하게 복잡한데, 풀자면 이런 얘기다. ‘부동산 때문에 정권이 생고생을 하고 있다. 그런데 금융사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감히 대출을 늘리고 있으니 금융위가 좀 잡아라.’ 지시는 지난해 8월에 나왔고 금융 당국은 9월부터 바로 대출 조이기에 들어갔다.
그 후 부동산 가격은 더 올랐다. 코로나로 돈이 많이 풀린 와중에 임대차 3법, 분양가 상한제 등 시장을 비트는 정부의 부동산 실책이 겹친 결과라고 수많은 전문가가 지적한다. 상식적으론 반시장적 부동산 정책 보완과 제대로 된 주택 공급이 먼저겠지만 올해도 처방은 대출에 쏠려 있다. ‘대출을 조여도 집값이 오르니 잡힐 때까지 더 조이자’란 논리다.
한국의 가계대출은 2분기에 41조원 늘었다. 숫자 하나로 표시되지만 대출 계약 하나하나엔 저마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부동산 잡자고 대출을 일괄적으로 틀어막는 사이 많은 삶의 계획이 부서져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정말 최소한 무주택자에 대한 대출만은 건드리지 말라는 많은 전문가의 목소리조차 무시된다. ‘첫 집을 계약한 신혼부부입니다. 대출이 줄면 못 사요. 계약금 날리고 취소하는 게 나을까요’ ‘전세 보증금이 올랐는데 대출이 막혔어요. 다주택자, 1주택자 저격하더니 이제 무주택자 차례입니까.’ 온라인 커뮤니티엔 이런 토로가 하루 수백 개씩 올라온다.
최근 임명된 금융위원장·금융감독원장 및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주 잇달아 만났다. 정권의 기조를 그대로 받아서 일제히 가계부채 대응을 최우선 목표로 올렸다. 코로나 장기화로 울분에 찬 자영업자들은 거리로 나서고, 상가마다 문 닫은 가게가 줄을 지었고,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체념하는 때에 경제 수장들은 입 모아 가계 빚과 총력전을 벌이겠다고 한다. 바로 지금 한국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가 대출이라고 정말 믿나.
잡히지 않는 부동산 가격을 소탕하려 대출이란 칼을 들고 돌진하는 정권의 모습은 돈키호테를 연상케 한다. 소설 속 돈키호테는 죽기 전 “망상 때문에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을 남겼다는데 이미 숱한 피해를 일으킨 뒤였다. 8월에도 수도권 아파트값은 또 크게 올랐다. 집값이 자꾸 상승해 정권의 ‘대출 소탕’이 더 거침없어질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집값이 내리는 그날까지 대출을 조이면 언젠가는 성공할지 모르겠다. 많은 피해자가 나오건 말건 이 정권은 ‘역시나 집값이 잡혔다!’고 기뻐할 것이다. 소설이 아니고 현실이어서, 더 겁난다.
김신영 기자
조선일보 경제부 김신영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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