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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꿈을 좇던 과학자들이 만든 수에즈 운하

by 최만섭 2021.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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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꿈을 좇던 과학자들이 만든 수에즈 운하

1798년 봄 나폴레옹, 병사 4만과 과학자 167명 소집령
‘해양 제국’ 영국 이기려 이집트 점령, 운하 건설 노려
英 넬슨 제독에 패해 꺾인 운하의 꿈, 19세기 초 부활
佛 레셉스와 과학자들, 증기기관차 발명한 英스티븐슨
힘 모아 해상 물류 판도 바꾼 수에즈 운하를 만들었다

민태기 연구소장

입력 2021.04.02 03:00 | 수정 2021.04.02 03:00

 

 

 

 

 

지난 3월 23일, 초대형 화물선이 좌초하며 수에즈 운하가 막히는 초유의 사고가 일어났다. 단 며칠간의 봉쇄로도 세계 경제가 출렁이는 모습에 연일 뉴스가 쏟아졌다. 그만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기에 앞으로 보완이 필요하겠지만, 이미 수에즈 운하는 그 자체로도 인류가 오랜 기간 만들어 낸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그 과정에는 수천년의 꿈을 현실로 만든 정치와 외교, 그리고 여기에 기꺼이 동참한 과학자들이 있었다.

1798년 봄, 프랑스혁명이 탄생시킨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 조제프 푸리에는 정부의 긴급 소집 명령을 받는다.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는 ‘푸리에 변환’을 만든 그는 최고의 수학자였다. 국가의 부름에 단숨에 달려간 항구 도시 툴롱에는 무려 4만 명의 병사와 만 명의 선원이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푸리에를 포함한 167명의 프랑스 과학자들도 함께 있었다. 하지만 최종 목적지는 아무도 몰랐다. 곧 그들을 이끌 사령관이 나타났다. 얼마 전 이탈리아 원정을 성공시킨 스물아홉 살의 나폴레옹이었다.

꿈을 좇던 과학자들이 만든 수에즈 운하 / 일러스트=김하경

7월, 오랜 항해 끝에 이들이 도착한 곳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집트였다.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단번에 이집트를 점령한다. 나폴레옹이 극도로 보안을 유지하며 이집트까지 가게 된 것은 프랑스를 위협하던 영국 때문이다. 인도 무역으로 부를 쌓던 영국에 이집트는 인도와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프랑스혁명 정부 역시 야심만만한 나폴레옹을 멀리 보낼 기회였다. 프랑스군의 최종 목적지를 알아낸 영국의 넬슨 제독은 나폴레옹을 필사적으로 추격해, 8월에 나일강 하구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한다. 불과 한 달 만에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고립되었다.

나폴레옹의 목적은 단순히 이집트를 점령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고대에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력한 해군으로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을 이기려면 이곳에 다시 운하를 뚫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굳이 대규모 학자들을 이집트에 데려갔던 것은 이 때문이고, 푸리에는 이들을 이끌고 각종 발굴과 조사의 책임을 맡았다. 바다에서는 나폴레옹이 넬슨에게 패했지만, 여전히 육지에서 나폴레옹은 강했고 영국군 역시 함부로 상륙하지 못했다.

영국과의 전투가 소강 상태에 빠지자, 나폴레옹은 본격적인 탐험을 시작한다. 목적지는 수에즈, ‘시작’이라는 뜻을 가진 지협(地峽)이었다. 마침내 나폴레옹은 고대 운하의 흔적을 발견한다. 푸리에와 과학자들은 지도를 작성하고 운하의 재건 가능성을 검토했다. 지중해와 홍해의 해수면 차이가 심하다는 보고도 있었지만, 푸리에는 그렇지 않다며 반박했다. 사막 탐험을 이어가던 그들은 ‘신기루’가 공기의 밀도 차이로 발생한 빛의 굴절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군에 둘러싸인 나폴레옹은 더는 운하에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고, 나폴레옹이 없는 프랑스 본국의 혼란도 문제였다.

 

1799년 위기를 느낀 나폴레옹은 푸리에와 군대를 남겨둔 채 홀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파리에서 쿠데타로 집권한다. 사령관 없이 이집트에 남겨진 프랑스군은 2년을 버티다 결국 영국에 항복했다. 프랑스군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영국과 협상을 벌인다. 이집트에서 발견한 유물을 모두 영국에 넘긴다는 조건이었다. 대영박물관으로 보내진 유물 중에는 ‘로제타석’도 있었다. 푸리에는 로제타석이 이집트 문자를 해독할 결정적 단서라는 것을 알았고, 영국에 넘기기 전 사본을 만들어 두었다. 풀려나 프랑스로 돌아온 푸리에는 이 사본을 샹폴리옹에게 건네고, 그의 후원을 받은 샹폴리옹은 마침내 이집트 문자 해독에 성공한다.

한편,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수에즈 운하 계획은 잊혀 갔다. 묻혀 있던 운하 계획은 뜻밖의 계기로 부활한다. 1832년 프랑스 외교관 페르디낭 드 레셉스는 이집트에 부임하러 가던 중 방역 조치로 배 안에 탑승한 채 격리된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려고 읽은 책에서 우연히 발견한 나폴레옹의 운하 기록이 그를 사로잡았다. 이후 온통 운하 생각으로 가득 찬 그를 찾아온 프랑스인들이 있었다. ‘생시몽주의자’로 불리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주로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 과학자들이던 이들 역시 운하를 꿈꾸고 있었다.

그들은 힘을 합쳐 ‘수에즈 운하 연구 모임(Société d’Études du Canal de Suez)’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심지어 증기기관차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던 영국의 스티븐슨도 합류했다. 꿈을 위해서라면 국적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들의 노력으로 운하 건설에 걸림돌이던 지중해와 홍해의 해수면에 대한 정밀 측정 결과, 푸리에의 분석과 마찬가지로 크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다. 타고난 외교관이던 레셉스는 이제 확신에 차 이집트 정부를 설득하고 자금을 모았다. 1859년 시작된 공사는 10년이 걸려 1869년에야 완공되었다.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베르디가 오페라 ‘아이다’를 작곡할 정도로 해상 물류의 판도를 바꾼 수에즈 운하는 이렇게 탄생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실패였지만 그의 패배가 두드러지지 않았던 것은 과학 탐사의 성과 덕분이다. 그는 과학자들과 함께 사막을 헤매며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생각을 나누었고, 결국 그 유산은 수에즈 운하를 완성하는 힘이 되었다. 이처럼 과학의 본질은 아마도 미래에 대한 꿈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꿈은 수천 년간 공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현실로 만들었다.

 

민태기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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