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을 무시한 점프… 니진스키의 착지를 본 사람은 없었다
英 발레 비평가 리처드 버클, ‘비운의 천재 무용수’ 삶 전해
입력 2021.03.20 03:00 | 수정 2021.03.20 03:00
니진스키
리처드 버클 지음|이희정 옮김|을유문화사|1128쪽|3만6000원
1909년 5월 프랑스 파리 샤틀레 극장. 세르게이 댜길레프가 이끄는 ‘발레 뤼스(러시아 발레)’ 공연을 본 관객들은 이런 수준의 춤을 경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객석에서 감탄과 신음이 번졌다. 테크닉과 표현력을 보여준 니진스키는 애정이 가득한 그 공기에 고무됐다. 걸어서 나가는 대신에 도약으로 무대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중력을 무시한 채 날아가는 듯이 보였다. 니진스키가 내려오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입이 떡 벌어지는 점프이자 퇴장이었다. 놀라움과 흥분은 폭풍 같은 박수 소리로 바뀌고 있었다. 발레 뤼스의 첫 시즌은 무용 역사에 기념비적인 느낌표를 쾅! 찍었다.
바츨라프 니진스키(1890~1950)는 ‘비운의 천재 무용수’다. 이 책을 쓴 영국 발레 비평가 리처드 버클은 “10년은 자라고, 10년은 공부하고, 10년은 춤추고, 30년 동안 빛을 잃어갔다”로 그의 생애를 요약했다. 니진스키의 삶은 눈부신 전반부와 캄캄한 후반부로 나뉜다. 빛은 어둠을 더 어둡게 하고, 어둠은 빛을 더 빛나게 만든다. 그 극명한 대비 때문에 전설로 기억되는지도 모른다.
1910년 ‘셰에라자드’에 출연한 니진스키. 이 무용수는 ‘셰에라자드’와 ‘지젤’에서 그가 가진 다양성을 발현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책은 아홉 살 난 둘째 아들 니진스키를 어머니가 페테르부르크 황실 발레 학교에 데려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유명한 무용수이던 아버지는 바람나서 가족을 버렸다. 큰아들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다. 생존을 위해 굴욕을 견디는 어머니를 보며 자란 니진스키에게 황실 발레 학교는 다른 세계로 가는 입구였다. 부끄러움을 잘 타던 소년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점프로 입학시험을 가뿐히 통과했다.
니진스키는 세상의 박수 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힘들이지 않고 다른 학생 머리 위로 솟구쳤고 허공에서 오래 머물렀으며 소리 없이 착지했다. 그는 재능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키(163cm)와 짧고 굵은 다리, 특징 없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날기 위해 태어난 곡예사 같았다.
댜길레프는 수완 좋은 기획자였다. 크체신스카야와 파블로바, 그리고 열아홉 살의 니진스키 같은 천재가 포진한 마린스키 발레단을 본 그는 러시아 발레를 유럽에서 공연하기로 마음먹었다. 관객 면면만으로도 예술 작품이었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와 장 콕토, 작곡가 생상스와 라벨,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 조각가 로댕.
무용수에게 분장은 ‘창과 방패’다. 무덤덤한 니진스키도 분장할 때만큼은 까다롭고 변덕스러웠다. 점점 다른 존재로 변해가는 거울 속 자신을 보면서 배역으로 빙의했다. 관객은 낯선 외계인처럼 무대를 가로질러 도약하는 이 무용수의 기적 같은 춤에 넋이 나갔다. 여성의 우아함이 겸비된 남성의 힘이랄까. 그 중성적인 매력에 사로잡혔다. 19세기에 발레는 환상적인 여성 무용수(발레리나)의 예술이 돼 버렸지만, 20세기 초 니진스키가 등장하자 모든 게 달라졌다. 남성 무용수(발레리노)의 역할을 여성 무용수와 동등한 위치로 올려놓으면서 발레 동작과 대본, 안무 등 표현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함부르크 발레단의 ‘니진스키’.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가 니진스키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LG아트센터
댜길레프에게는 동성애 기질이 있었다. 매혹적인 도시의 환호 속에 사랑에 빠진 두 남자는 20세기 러시아 발레의 황금기를 이끈 환상의 듀오였다. 그러나 그 관계는 곧 파국을 맞았다. 니진스키가 여성 무용수와 결혼하자 댜길레프가 그를 해고했다. 안무가 니진스키가 고전 발레의 형식을 파괴한 ‘목신의 오후’는 선정성 논란을 불렀고, 격렬한 동작을 선보인 ‘봄의 제전’은 관객의 야유와 소란을 부추겼지만 20세기 발레의 새 지평선을 열었다. 1차 세계대전 후 1919년 니진스키는 예술적·육체적·재정적 불안 속에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길고 어둡고 쓸쓸한 추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대한 증언과 믿음직한 자료로 속을 채운 책이다. 현대 발레가 태동하던 시기 유럽 예술계 풍경을 입체적으로 담아냈다. 하지만 다 읽어도 의문은 남는다. 니진스키가 보여준 점프의 비결, 갑작스러운 결혼, 광기(狂氣)의 원인 등을 속 시원하게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확신이 없을 경우 단정하지 않는 저자의 태도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엉거주춤하고 무책임해 보이기도 한다.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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