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자 “뽕짝 가수로 내몰렸던 소외감, 트롯맨들이 풀어줬죠” [영상]
1일 TV조선 ‘트롯어워즈’ 특별출연하는 이미자
“한국현대사와 함께한 전통가요
국민과 시대의 아픔 위로했죠
트로트가 지금의 열풍 이어가면
BTS처럼 되지 말라는 법 있나요”
입력 2020.09.29 22:25
헤일 수 없이 불렀던 ‘희대의 명곡’이지만, 그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할게요, 미안합니다.” 벌써 여섯번째.
사랑도, 그리움도 설익었던 스물셋 어린 나이부터 부른 노래지만, 여든을 앞둔 이미자에게 ‘동백아가씨’는 붉게 멍든 꽃잎처럼 닿을 수 없는 사랑이자 그리움인 듯했다.
28일 오후, TV조선 ’2020트롯어워즈' 사전녹화가 진행된 경기도 일산 킨텍스 7홀. 여덟번째만에 한곡을 끝내고 빙그레 웃은 이미자는 반주를 해준 관현악단에 허리 굽혀 인사했다. 그는 쉬지 않고 곧장 두번째 곡 녹화에 들어갔다. 데뷔 50주년때 부른 ‘내 삶의 이유 있음은’. ‘나 홀로 걷다가 뒤돌아보니 인생길 구비마다 그리움만 고였어라, 쓰라린 아픔 속에서도 산새는 울고, 추운 겨울 눈밭 속에서도 동백꽃은 피었어라...’.
화려한 몸짓, 격정어린 표정 하나 없이 오직 목소리만으로 청중의 가슴을 움켜쥘 가수 몇이나 될까. 대선배의 리허설 현장을 지켜본 가수 임영웅은 “아~ 너무 떨려서 뭐라 말할 수가 없어요. 가슴을 치는 노래가 이런 거구나 싶습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미자의 절창은 오는 1일 밤 8시 TV조선 ’2020 트롯어워즈'를 통해 방송된다. 당일 생방송에도 출연해 한국 트로트 100년을 빛낸 스타 가수들과 ‘K트로트’의 가능성을 보여준 트롯맨들을 만날 예정이다. 사전녹화를 마친 이미자를 대기실에서 만났다. “목소리가 내 맘대로 안 나와요, 실력 발휘가 안돼요” 하며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는 2시간여 인터뷰를 무대에서처럼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해냈다.
28일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사전 녹화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가수 이미자. 검정색 드레스는 패션 디자이너 지춘희가 이미자의 '트롯어워즈' 무대를 위해 특별 제작한 것이다./TV조선
-‘트롯어워즈’에 ‘동백아가씨’와 ‘내삶에 이유 있음을’을 택하신 이유는 뭘까요.
“데뷔곡은 아니지만 ‘동백아가씨’는 ‘이미자’란 이름을 탄생시킨 곡이에요. ‘내 삶의 이유 있음은’은 제가 데뷔 50주년에 부른 노래인데, ‘미스터트롯’(결승)에서 영탁이가 그걸 불러 선전해 주더군요(웃음). 유튜브 댓글을 보니 영탁이 부른 바람에 이 노래가 이미자 것인 줄 알았다는 사람 많더라구요. 제가 만날 ‘동백아가씨’ 스타일로만 부르는 줄 알았던 분들이 신선했던가 봐요.”
-요즘 트로트가 붐입니다.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덕분이죠. 나는 트로트란 말을 좋아하지 않고 전통가요라고 부릅니다만, 대중가요의 본분은 사람들 마음을 달래주고 어루만져주는 거잖아요?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1위를 한 것처럼 우리 가요도 우물 안에서 벗어나 세계로 진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후배들이 갖게 해줬어요. 고맙고 대견하죠”
-100년을 이어온 선배 가수들의 무수한 노력이 쌓였다가 폭발한 게 아닐까요.
“식민지, 해방, 전쟁으로 이어져온 현대사 100년의 아픔과 설움을 우리 가요가 함께 했죠. 외롭고 어두운 시절을 견디고 또 지켜왔기 때문에 오늘이 있다고 생각해요. 재즈, 팝송에 밀려 전통가요는 늘 촌스럽고 수준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져 왔거든요. 왜색이라 비판받고. ‘동백아가씨’ 앨범이 100만장 이상 팔렸지만 ‘뽕짝 가수’로 낙인찍힌 제가 느꼈던 소외감, 그 외로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2020년 9월 28일 일산 킨텍스에서 다음달 1일 열릴 TV조선 ‘트롯어워즈2020’ 특별 출연하는 이미자 선생님이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김연정 객원기자
-젊은 가수들이 부르는 트로트는 어떻습니까?
“저희 세대와는 정말 다르죠. 저는 그 자리에 붙박여 서서 노래할 줄밖에 모르는데 젊은이들은 빠른 템포에 춤도 잘 추고, 말들도 정말 잘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아무리 인기 있는 노래라도 시대를 위로하고 사람들 가슴을 어루만져주지 못하면 반짝하고 사라진다고 생각해요. 6·25 동란때 불린 ‘전선 야곡’이란 노래를 아세요?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립다. 들려오는 총소리 자장가 삼아 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한수 떠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이런 노랫말, 이토록 아름다운 곡을 요즘 찾아볼 수 없어요. 뜻도 모를 사랑 타령에 비속어들이 난무하고요. 안타깝죠.”
-후배 가수들, 트롯맨들 중엔 누가 노래를 제일 잘하나요?
“저마다 개성이 있으니 누가 제일 잘한다 단정할 순 없어요. 다만 기교보다 가사의 내용을 원숙하게 이해해서, 청중의 가슴에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가수를 좋게 봅니다. 누구는 꺾기를 잘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꺾기는 각자의 개성일 뿐이에요. 제 노래에 꺾기는 단 하나도 없어요. 유명가수의 창법을 따라하고 모션도 똑같이 하려는 후배들을 보면 실망스럽죠. 그럼 영원히 2등밖에는 못해요. 가곡이든, 발라드든, 트로트든 누굴 흉내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를 때 객석은 감동합니다.”
-60주년 인터뷰에서 노래할 때 감정의 과잉을 경계하셨어요. 음표대로, 박자대로만 부른다고 하셨죠.
“노래를 자꾸하다 보면 기교를 부리고 싶은 유혹에 빠져요. 잠깐 들을 땐 좋지만 매번 부리면 듣기 싫어지는 게 기교죠. 그래서 저는 높지도 낮지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불러요. 인생도 ‘앞서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산 것 같지 않아요. 그냥 좀 뒤에 처지더라도 꾸준히 가자, 앞서가면 넘어질 수 있으니 천천히 바르게 가자 했지요."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자의 목소리는 가질 수 없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타고나야 하는 건 맞아요(웃음). 제가 네다섯 살땐가, 아버지 친구분들이 집에 오셔서 막걸리 드시고 젓가락 두들기며 유행가를 부르시면 이튿날 제가 가사 하나 안 틀리고 따라부르더래요. 총기가 좋게 잘 부른다 하는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고 보니 선생님도 경연대회 1등 출신입니다.
“그때는 경연이 아니고 콩쿨대회라고 했어요. 어딜 가나 1등을 해서 화제가 됐죠. 플라스틱 그릇이나 조리 같은 걸 상품으로 받고요. 1등인데도 나이가 너무 어려서 특별상을 주고 그랬어요(웃음).”
-어릴 땐데, 무대가 무섭거나 두렵지 않았나요?
“아니요. 두렵지 않았어요. 오히려 나이 든 지금은 노래하기가 두려운데 그 당시엔 뭣 모르고 불러서 그런가, 하나도 안 두려웠죠(웃음).”
-트로트의 여왕이지만 음악의 장르를 바꿔보려 했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동백아가씨가 금지곡이 되고, 전통가요는 서구적인 노래들에 밀리니 실망이 컸죠. 50-60년대 미8군 출신 가수들이 활약했는데 그들은 또 영어로도 노래를 부르니 이래저리 전통가요는 촌스럽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그래서 발라드로 바꿔볼까 생각도 했는데 주변 머리가 없어서 그런지 참고 또 참으며 여기까지 온 거죠. 참을 인(忍)자 세번이면 사람을 구한다는데(웃음). 그래도 ‘타향살이’라든지 ‘번지없는 주막’ ‘눈물 젖은 두만강’ 같은 노래가 명곡이 되고 오랫동안 히트한 것은 그 시대를 가장 잘 대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뿌리를 후배 가수들이 잊지 않고 지켜줬으면 좋겠어요."
-‘여자의 일생’처럼 어머니들이 부엌에서, 들판에서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명곡도 대개 이미자 노래입니다.
“온 시대가 아팠지만 여성은 더 고통 받았어요. 배고팠고, 가난했고, 배우지도 못했고요. 그 억울함과 설움을 남편에게도 말 못하고 혼자 가슴 조이며 살아온 한국 여인들 아픔을 제 노래가 달래드렸다는 뿌듯함이 있습니다.”
-자기 관리 철저하기로 이름이 높습니다. ‘이미자’란 이름 석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마음껏 해보고 싶은 목록 있을까요?
“전혀요. 오직 노래만 부르고 살아와서 내가 다른 인생을 살았다면 어떨 것인가란 생각은 한번도 안해봤어요.”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걷겠다는?
“아유, 그건 아니예요(웃음). 남들은 찬사와 박수를 보내지만 제 삶엔 아팠던 기억이 더 많아요. 그 아픔과 슬픔을 노래로, 국민들 사랑으로 버텨왔다고 생각합니다.”
/대담=김윤덕 문화부장, 정리=최보윤 기자
김윤덕 문화부장 편집국 문화부 부장
최보윤 기자 편집국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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